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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섬발리섬'''({{llang|id|Bali}})은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자와 섬]]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광|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구는 약 310만 명이다.
 
[[소순다 열도]]에 속한 섬으로 [[자와 섬]]에서 북쪽으로 3.2 km 떨어져 있다. 길이 153 km, 폭 112 km 크기로 면적은 5,700 km²이다. 가장 높은 산은 섬 북동부에 위치한 3,148 m의 [[아궁 산]]으로 [[1963년]]에도 분화한 적이 있는 [[화산|활화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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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이 되면서 당시의 불어닥친 제국주의 열풍의 유행 아래서 네덜란드가 발리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여, 각 지역의 왕가를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먼저 [[1846년]] 발리 쪽의 난파선을 끌어올린다는 요청을 빌미로, 발리 동북에 군대를 상륙시켜 [[부레렝]](Buleleng)과 [[젬브라나]](Jembrana)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침공을 진행하여,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고, 발리 전체를 식민지화 시켰다. 그러나 이때 발리 왕족, 귀족들이 보였주었던 ‘[[뿌뿌탄]]’(Puputan, 무저항 대량 자결)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전통 문화를 보전하는 정책을 내놓게 된다.
 
이 전통 문화 보호 정책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917년]] 발리 섬발리섬 남부 지진 이후에 닥친 재앙이다.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부상자는 1000명을 넘었고, 다음 해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독감이 발리에도 퍼졌으며, [[1919년]] 발리 남부에 생쥐가 대량으로 발생해 곡물 수확량이 격감 하였다. 이런 역경을 두고 당시 발리 사람들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들에 대한 의례를 다하지 않았던 신들의 진노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론의 행진’과 ‘[[상향 드다리]]’(''Sanghyang Dedari'', 빙의 무용)가 성행하게 되고, 주술적인 의례, 놀이 활동이 발리에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현상을 네덜란드 사람들은 발리의 전통 문화로 이해하고, 재해 복구와 함께 보호를 진행한 것이다. 특히 부흥 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던 건축가 모엔은 발리의 진정한 전통 문화의 존재를 믿고, 지진 이전 발리가 중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고, 이러한 "실수"를 부흥의 과정에서 배제하려하였지만, 결국 그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위와 같은 네덜란드의 문화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반신 누드 부녀" 그림과 함께 서양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레고르 클라우제의 발리 사진 컬렉션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1924년 바타비아 - 싱아라자 간의 정기선 취항이 시작되었다). [[1932년]]에 발리를 방문한 [[찰리 채플린]]은 "발리 행을 결정한 것은 형 시드니였다. 이 섬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미치고 있지 않고, 섬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자아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전의 관광객 수는 [[1920년대]]에는 연간 1,200 - 3,000명 정도였으나,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통계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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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파일:Bali-Ubud 0704a.jpg|thumb|upright|left|발리의 신전]]
발리 섬은발리섬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 속하는 소순다 열도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서쪽에는 발리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선다 열도에 속하는 [[자와 섬]]이, 동쪽에는 [[롬복 해협]]을 사이에 두어 [[롬복 섬]]을 포함한 누사 트가라 제도가 있어, 띠모양의 열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발리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3km 정도이며, 발리의 해안에서는 [[자와 섬]]의 자형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관계에 있는 발리 섬은발리섬은 넓은 [[인도양]]을 중심으로 [[필리핀]]에서 [[홍해]]까지를 잇는 [[태평양]]의 넓은 녹지대에 위치해,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처럼, 옛날부터 이 넓은 바다를 이용한 교역이 발달하여 사람과 물건, 말과 사상의 이동,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교역을 통제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형성하는 왕국이 탄생해, 발리 섬의발리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지형 ===
[[파일:Bali Labeled.png|thumb|220px|발리의 지형]]
발리 섬은발리섬은 면적이 5,633km로 섬의 북부를 동서로 화산맥이 달려, 발리 [[힌두교]] 신앙의 성산으로 여기는 아군산(해발 3,142 m)이나 [[킨타마니 고원]]으로 알려진 바트르산(해발 1,717m) 등 많은 화산을 가지고 있다. 근처에는 온천이 용출 하고 있다. 이 화산대의 활동은 발리 섬의발리섬의 극히 비옥한 토양을 가져다 주었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재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발리 섬의발리섬의 남부의 화산맥에 위치하는 브라탄 호수 등의 호수로부터의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스박크로 불리는 전통적인 수리 조직에 의해서 21 세기 초까지 그 자연 환경과 함께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 수계에 의해서 섬의 남쪽 전체가 초록이 넘치는 토지가 되었다.
 
=== 기후 ===
[[파일:Climate Diagram Denpasar.PNG|thumb|220px|[[덴파사]]의 기우도<ref>각 수치는 1961년 - 1990년까지 30년간 평균。[[세계기상기관]] (WMO)의 데이터</ref>]]
발리 섬발리섬 주변은 사바나 기후에 속하며, 계절은 북서 계절풍이 부는 우기(10월 - 3월)와 남동 계절풍이 부는 건기(4월 - 9월)로 명확하게 나뉜다. 이 계절풍에 의한 거센 파도는 해상 교통에 지장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외침으로부터의 보호막이 되기도 하여 독립성을 유지한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건기의 사이는 동부, 북부를 중심으로 물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우기에는 하루에 2 ~ 3시간 [[스콜]]이 내린다. 심할 때에는 30cm의 집중호우가 내릴 때도 있으며, 도로가 침수되기도 한다.
 
년중 기온의 변화는 거의 없고, 연간 최저평균기온은 약 24도, 최고평균기온은 약 31도, 또, 평균 습도는 약78%로 덥고 습도도 높지만, 체감 기온은 바다 바람에 의해 훨씬 부드럽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기와 우기의 구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온난화의 영향을 받아 연중 높은 기온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기 중 한낮의 최고기온이 34도 이상을 웃도는 뜨거운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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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 ==
* 발리 섬은발리섬은 발리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도는 [[덴파사]]이다. 8개의 군(''kabupaten'')과 1개의 시(''kota'')로 구성된다.
* 시(''kota'')
** * [[덴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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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fferings on the sand, Kuta Beach, Bali.JPG|thumb|left|150px|모래 위에 바치는 제물(쿠타 비치)]]
=== 종교 ===
2005년 통계에 따르면 발리 섬에는발리섬에는 3,151,162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이슬람교가 많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리 섬발리섬 사람의 92%는 지역화된 [[힌두교]]인 [[발리 힌두교]]를 믿는다. 그 뒤로는 [[이슬람교]](5.7%), [[기독교]](1.4%), [[불교]](0.6%) 순이다.(2003년 통계)
 
"신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발리에서는 사람의 약 90%가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에 의해 성립된 발리 힌두교를 신앙으로 받들고 있다. 발리 전통 마을 (데사, 아닷트)에서는 토지와 조상신에 대한 믿음을 신봉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데사 아닷트 위치를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방지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습(아닷트)도 꽤 짙게 남아 있어 상점이나 집 앞에는 매일 아침 챠난이라는 제사의식을 진행하는 등 종교 활동에 많은 시간이 보내고 있다. 따라서 매일 발리 섬발리섬 어딘가에서 축제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발리 사람들은 축제에 대해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발리 사람들에게 축제(우파차라)는 어디까지나 이상과 같은 종교 의식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리 사람들은 매우 영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발리 힌두교의 세계관은 방향에 따라 지행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카쟈"(산쪽)와 "쿠롯도"(바다쪽)의 조합이다. 카쟈과 쿠롯도 대비는 위와 아래, 우세와 열세,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상징적인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원의 위치와 장례식 장소, 저택의 구조 등이 대비 따라 정해져 있다. 또한 질서관에서 사람의 머리를 만지거나,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이나, 왼손으로 돈을 취급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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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ewiSri.jpg|thumb|150px|곡식의 여신 듀이스리]]
[[파일:Bali-Danse 0707a.jpg|thumb|150px|[[레공]] 춤]]
섬 남부를 중심으로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발리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아침, 저녁 각각 2,3 시간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의 창작 활동에 종사하여, 미술,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리 섬은발리섬은 공연 예술, 그림, 조각 등 예술로 유명해졌다.
 
발리의 예술은 오래전부터 인도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세대를 거치면서, 발리 고유의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인도의 흔적이 짙게 남은 유물로 페즐에서 출토된 점토로 만든 봉납판(8세기)에는 인도 [[팔라 제국]]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불교 삼존 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인도 힌두교의 석조인 두르가 상(11 세기 무렵)도 걸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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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 해변 리조트 ===
[[파일:Sanur 200507-2.jpg|thumb|240px|사누르 비치]]
발리 섬의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1969년 [[응우라라이 공항]]의 개항에 의해 단체 관광을 위한 대규모 개발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판타이 사누르(Sanur)와 꾸따(Kuta)가 관광의 중심이 되었다.
 
곧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누사 두아]]에 고급 리조트를 건설하는 개발이 진행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발의 물결은 이들 지역을 너머 꾸따 남북으로 확산되었다. 세미냑, 레기안, 짐바란에서 탄중 베노아에 이르는 해안에 넓은 관광 지대가 형성되게 되었다. 세미냑의 북쪽에는 [[타나 롯 사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누르와 꾸따에서는 폭탄 테러 사건 전후에서 당국과 현지 사회의 치안 유지를 위해 단속이 진행되어, 포장 마차 등을 제거하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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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위키공용분류|Bali}}
{{위키여행|en:Bali|발리 섬발리섬{{언어고리|en}}}}
* [http://www.socialcapitalgateway.org/bali.htm Pictures of Bali]
* [http://www.baliprov.go.id/ 발리 섬발리섬 공식 사이트]
 
{{인도네시아의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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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도네시아의 섬]]
[[분류:인도네시아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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