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보성사 터 기념물 내용 추가
편집 요약 없음
35번째 줄:
 
=== 보성사와 조선독립신문 ===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은 3월 1일 만세 운동이 터지면 자신이 구금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전 2월 28일 이종린으로 하여금 창간호의 원고를 집필하도록 하였다. 보성사에서 김홍규 감독에게 독립신문 1만 5천 부를 인쇄하여 3월 1일 배부케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촉구한 <[[조선독립신문]]> 제 1호가 극비리에 간행될 수 있었다. 당일 오후 6시에 발행인 윤익선은 체포되었고 이에 창간 실무를 담당했던 이종린은 독립신문을 프린트 판으로 계속 발행하기로 하였다. [[이종린 (1883년)|이종린]]은 3월 2일 장종건에게 간행비 20원을 전하였고 그에 따라 이종린은 독립신문 제 2호부터 4호까지 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3월 10일 원고와 등사 기구 일체를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그 후 독립신문은 천도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장종건의 주도 하에 장소를 옮겨다니며 계속 발행되었으며 3월 25일 장종건 등이 체포된 후에도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6월 22일 제 36호와 8월 29일 국치기념호까지 간헐적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 발행 후 경향 각지에는 이에 고무되어 <신조선신문>, <조선민보>, <국민신보>, <혁신공보> 등이 연달아 간행되어 독립 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chondobs.or.kr/bbs/zboard.php?id=shiilbo&page=1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1|제목=천도교 부산시교구|확인날짜=2017-05-23}}</ref>
 
=== 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