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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씨는 2000년 대한민국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831,675명으로34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한국의 성씨]] 인구 순위 77위이다. 본관은 [[장흥 위씨|장흥]](長興) 단본이다. 고대 역사 인물로 통일신라시대 진골 귀족으로 [[혜공왕]]의 장인인 [[위정]](魏正)이 있다.
 
'''[[장흥 위씨]]'''(長興 魏氏) 시조 '''위경'''(魏鏡)은 중국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으로 638년 [[신라]] [[선덕여왕]]의 초청으로 [[당 태종]]이 파견한 팔학사의 일원으로 [[신라]]에 동래하였다고 한다. 위경(魏鏡)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侯)·아찬(阿湌)·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다.
* '''[[장흥 위씨]]'''(長興 魏氏) 시조 '''위경'''(魏鏡)은 중국 관서 홍농 사람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당 태종]]에게 도예지사를 청하자 보내준 [[당나라]]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다. 경(鏡)이라는 이름은 960년 [[후당]] 황제가 지어 주었다고 한다. 위경(魏鏡)은 10세기 [[오대십국]] 때 [[후당]]에서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랑상서 시중에 이르렀으며 회주군(현재의 [[전라남도]] [[장흥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초 대각간시중(大角干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세계를 이어왔다. 위창주의 아들 '''[[위계정]]'''(魏繼廷)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보궐지제고(左補闕知制誥)를 거쳐 선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고, 숙종 초에 예부와 이부의 상서가 되어서도 결백하고 지조있는 관료생활을 계속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어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를 거쳐 1101년(숙종 6)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1104년 문하시랑평장사 겸 태자소사(門下侍郎平章事兼太子少師), 이듬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53 《고려사》 권95, 열전8] </ref> 장흥 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 무과 급제자 18명을 배출하였다.<ref>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68_532_0292|장흥 위씨}}</ref>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선조 때 수군절도사 [[위대기]](魏大器), 영조 때 [[좌부승지]] [[위창조]](魏昌祖), 고원군수(高原郡守) [[위흥조]](魏興祖) 등이 있다.
 
[[고려]] 초 대각간시중(大角干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위창주의 5세손 '''[[위계정]]'''(魏繼廷)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1105년(예종 1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53 《고려사》 권95, 열전8] </ref> 장흥 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ref>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68_532_0292|장흥 위씨}}</ref>
 
== 가죽 위 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