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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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전라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
|사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사망일 = {{사망일과 만나이나이|1951|1|5|1864|1|7}}
|장르 = [[시 (문학)|시문학]], [[소설]]
|활동 기간 = [[1879년]] ~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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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전투/전쟁 = [[갑신정변]] <br /> [[미국-스페인 전쟁|미국-스페인 내전]] <br />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기타 이력= 중추원 고문, 농상공부 고문 <br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 <br /> 미 군정청 고문 <br />미 육군 명예 공중보건의<ref> [[1898년]] 4월부터 1898년 [[8월]]까지 미국 육군본부 군의참모부 예하 병원선 소속 명예 공중보건의(무계급 신분 공중보건의) 복무</ref><br />미 육군 명예 군의관<ref>[[1941년]] [[1월 6일]]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국 육군|미국 육군본부]] 소속 징병징집 담당 명예 [[군의관]](무계급 신분 군의관) 복무</ref>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조선]]의 [[무신 (관직)|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의 독립 운동|한국 독립운동가]], [[의사]]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시 (문학)|시인]], [[소설|소설가]]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이고, 자(字)는 윤경(允卿), [[호 (이름)|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다. 일명 “피제손”<ref name="hist37s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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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그러나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필립 제이슨''' 또는 '''피제손'''으로 표기하였다.
}}</ref><ref>이는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음역]]한 것이다. 또는 제이슨(Philip Jason)이라고도 자칭했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ref> 필명은 오시아(N. H. Osia)<ref name="hansu1">[http://www.kormedi.com/news/article/1199475_2892.html 의사-언론인 서재필, 소설가이기도 했다], 코메디닷컴, [[2010년]] [[12월 2일]].</ref> [[전라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ref>본가는 [[충청남도]] [[논산]]에 있었고 [[논산]]과 [[대전]]에서 성장했으므로 [[충청남도|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전라남도|전라도]] [[동복군]] [[문덕면]] 출생이며 [[충청남도|충청도]] [[논산시|논산군 논산면]]과 [[대전광역시|충청도 회덕군 대전면]]과 [[달성군|경상도 달성군 현풍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전라도]] [[보성군]] [[보성읍|용문면]]에서 성장하였다.
</ref> [[김성근]](金聲根),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과거 시험|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육군 도야마 학교|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ref>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배우자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조카들과 동생 서재창의 유복자, 서재우의 아들 등이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결혼한 큰누나와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여동생 [[서기석]] 등은 겨우 살아남았다.</ref> 그는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대한제국|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 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남조선과도정부|과도정부]]의 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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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가계와 출양 ====
송재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1863년]] [[음력 11월 28일]])<ref>서재필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아 [[1864년]]생 설 외에도 [[1863년]] [[11월 28일]]생 설도 있다., 경향신문 1969년 08월 09일자 4면, 사회면</ref><ref>또 [[10월 28일]]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ref><ref>서재필은 자서전에서 태어난 해를 [[1866년]]이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태어난 해는 그보다 2~3년 빨랐다고 한다.</ref><ref name="gangbak">[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28/2011062802460.html 자서전 쓰기] 조선일보 2011.06.28</ref><ref> name="gangbak"/><ref>일각에서는 서재필이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는 견해도 있는데, 서재필이 자신의 '최연소 [[장원]][[급제]]'를 내세우려는 강박에서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ref><ref name="gangbak"/> <ref>서재필은 [[1947년]] [[김도태]] 등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1866년생이라고 했지만, [[김규식]]은 인터뷰에서 서 박사는 85세 고령이라고 했고, 그의 조카 서호석(徐昊錫)은 1863년 음력 11월생이라 했다. 또한 [[에드워드 와그너]]에 의해 정리되어 [[2000년]] 공개된 [[사마방목]]에도 1863년생으로 확인되었다.</ref> 외가가 있는 [[전라도]] [[동복군]](현재의 [[보성군|보성]])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 (1792년)|이기대]](李基大)의 5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ref>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ref>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ref name="sss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72891 서재필 외가의 태교철학 담긴 보성 - 오마이뉴스] 2004년 3월 5일</ref>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면|동복]], [[문덕면|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ref>외삼촌 이지용은 64세에 관직에 나가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가내마을 전설에 의하면 서재필이 태어나기 전 그의 외삼촌 이지용이 마을어귀 고목나무에 큰 뱀이 혀를 내밀고 널름거리는 태몽을 꾸었다 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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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ref name="songgun21">송건호,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21페이지</ref>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냈다.
 
서재필은 [[조선]] [[조선 영조|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조선 경종|경종]] 때 [[왕세자|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ref> 그의 선조들 중에는 [[조선 정조|정조]]때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가 있었다.</ref> 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光敎), 광언(또는 광효), 광업(光業)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ref>[[보성군]]의 재력가였던 장인 [[이기대]](李箕大)의 집</ref> 에서 10여년 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徐載春),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서재형(徐載衡<ref>매천야록에는 그가 친형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이다.</ref>)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徐載昌), [[서재우]](徐載雨 또는 載愚)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아버지 서광효는 그에게 쌍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가 뒤에 재필로 이름을 바꾸고, 자(字)를 윤경(允卿)이라 지어주었다. 서재필은 후에 쌍경을 자신의 첫 아호로 사용하였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 비주류였지만 당파 싸움을 극도로 혐오하던 서재필은 후일 [[1947년]] 당시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인 [[김도태]] 등과 면담할 때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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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의 친 누나는 그가 태어날 무렵 [[담양군]]에 사는 영일 정씨 [[정해은]](鄭海殷)에게 시집가 [[전라도|전남]] [[담양군]] 지실마을로 시집갔다.
 
그의 가계는 6대조 서유승이 [[통덕랑]]을 지낸 이후 변변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ref> 서재필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 [[서광효]]가 [[진사]] 시험에 합격하자, 경사가 겹쳤다 하여 유년기에 서재필의 아호를 ‘쌍경(雙慶)’이라 정하였다.</ref><ref name="fisasa">{{서적 인용
|저자=김도태
|제목=서재필박사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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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31~32쪽
|꺾쇠표=예
}}</ref> 생부 [[서광효]]는 늦게 처가가 있는 [[보성군|보성]][[군수]]로 부임하였다.
 
;양자 출양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ref name="fisasa"/>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 (1812년)|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누나였다.<ref name="naeils11">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13호》 (서해문집, 2003) 211페이지</ref><ref>나중에 그가 후일 자신을 일부 모델로 삼아 작성한 자전적 소설인 '[[한수의 여행]]'의 한 부분에 이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 놓았다. 이 소설에는 양부(養父)를 찾아 상경하는 [[평안도]] 출신 시골 소년 박한수가 느꼈던 생이별의 아픔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 야망, 후에 [[기독교]]를 접하고 독실한 믿음이 생겨난 것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미국]]에 1차 망명후 되돌아온 [[1890년]]대 후반, 그는 이를 영화화 하려 하였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실패했다.</ref><ref>서재필이 살던 [[한성부]]의 집은 [[갑신정변]]으로 헐렸지만, 서재필이 유년 시절 거처하던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1리의 본가는 이후 [[2005년]]까지도 있었다. 금곡1리 집에서는 [[2005년]] [[3월 3일]] 이후 매년 서재필 추모제가 거행되고 있다.</ref><ref>[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281 송재 서재필 박사 추모제 거행] 충청투데이 2005.03.04</ref><ref> [[2005년]] [[3월]]에는 [[연무읍]] 금곡1리 마을 회관에 서재필의 사당이 세워졌다.</ref>
 
==== 유년기 ====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 넘쳤다.<ref name="songgun21"/><ref name="songgun21"/><ref> 그 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의 가문에서는 어린이들이 나약하거나 잘못했을 때는 "[[미국]]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훈계하여, 그의 어린 시절이 그의 가문에 영향력 있는 귀감이 되기도 했다.</ref><ref name="songgun21"/>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 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바탕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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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ref> 이는 그의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ref>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ref> [[윤치호]]에 의하면 '이런 기질로 인해 그는 종종 주변인들로부터 적잖은 빈축과 험담을 샀다'고 한다.</ref>
 
==== 수학과 소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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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72년]](고종 10년) [[서울특별시|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양아버지의 권고로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사기]]》(史記),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 한다. 그 중에는 뜻을 아는 것도 있었으나 일부는 암기를 해 두었다.<ref> 후일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양아버지 집에서의 천대꾸러기 생활이 그의 낮선 환경 적응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았다. 주진오 교수는 "당시(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갔을 때)의 상황을 보면 서재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현실 적응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는 눈칫밥을 먹으면서 자란 경험이 오히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적응력을 발휘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고 보기도 했다.</ref><ref name="naeils1212">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13호》 (서해문집, 2003) 212페이지</ref>"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ref>
 
{{인용문2|김옥균은 대인격자였고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비록 현대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하 중략)... [[김옥균]]은 서구가 몇 세기에 걸쳐 이룬 문명을 일본이 불과 한 세대에 달성한 사실을 알고는 일본을 모델로 하여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서재필의 회고담}}</ref><ref>서재필은 후에 '누구 누구 해야 내게 제일 강한 인상을 준 이는 [[김옥균]]이다. 서문은 물론이고 [[사죽]](絲竹)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데 없는 그의 높은 재기는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김옥균]]의 강렬한 인상은 일부 젊은이들에게는 거부감을 주었지만 서재필은 그의 강렬한 인상에 빠져 오래도록 그를 흠모하였다.</ref>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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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 ====
[[1878년]](고종 15년) 봄 서재필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고종 16년) 초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그해 봄 [[대한제국 고종|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殿講)에서 1등하여 직부전시<ref>복시와 감시,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문과에 응시할수 있는 자격</ref> 의 명을 받아, 바로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 삼경 중 아무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 결혼하였으나 곧 사별하였다. [[1881년]](고종 18년) 봄 다시 [[김영석]](金永奭)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김반 (1580년)|허주 김반]], [[김집 (1574년)|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ref>[[김장생]]-[[김반 (1580년)|김반]]-[[김익훈]]-[[김만채]](金萬埰. 1644~1715)-김진상(金鎭商), 김진항(金鎭恒)-김령택(金令澤)-김상정(金相定, 1722~1788)-김기덕(金箕德)-김재의(金在義), 김재이(金在差+次)-김경현(金敬鉉)-김영석-서재필의 처 광산 김씨</ref><ref> 광산김씨의 아버지 김영석은 [[한성]] 출신으로, [[1864년]](고종 1년) 증광문과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지]]에 이르렀으나 [[갑신정변]] 때 서재필에게 연좌되어 파면당했다. 김씨의 친정 할아버지 김경현(金敬鉉)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강과 경연관, 삼사의 요직을 거쳐 [[승지]]를 지낸 집안이었다.</ref>
 
18세 되던 [[1882년]] [[3월]] [[조선의 과거 제도|증광 문과]]에 병과(3등)으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ref name="chosun0408">[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8/200408240343.html (운명의 20년) 서재필은] 조선일보 2004.08.24일자</ref> 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金中植)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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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rkyh-1910.jpg|thumb|left|140px|[[박영효]]]]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ref> 서재필은 13촌 아저씨뻘 되는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ref>{{인용문2|어느해 봄철이지? [[김옥균]]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서대문]] 너 머 새절(봉원사)에 놀러가자고 했지. 그래 그 절에 갔더니 중 한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매우 공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이었어. 한데 이 중이 말하길 세계 여러 나라 도회처며 군인의 모양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걸 글라스(유리 안경)로 보는데 그 이름이... 옳아! 요지경! 요지경으로 보는데 모두 처음 보는 것이라 너무 재미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이 중이 [[일본]]에서 나온 책 [[만국사기]](萬國史記) 한 권을 가졌는데, 이 책으로 여러 나라 이름이며 내용을 대강 알 수가 있었거든. 그래 [[김옥균]]이 이런 책을 어디서 또 구할 수 있느냐 한즉 책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구할수 있다고 한단 말이야. 그래서 [[김옥균]]이가 돈을 주어가면서 책이며 여러 가지 물건을 사오라고 했지<br /><br />귀국 직후 인터뷰에서}}</ref>
 
[[파일:개화파 01.jpg|thumb|right|180px|[[일본]] 체류중 촬영한 사진<br />(맨 왼쪽이 [[박영효]], 그 뒤는 [[서광범]], 우측 두 번째가 서재필, 우측 앞이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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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柔術) 전반에 대해 배웠다.<ref name="sosi74">포럼 편집부, 《푸른 꿈을 꾸다》 (포럼, 2007) 74페이지</ref>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육군 도야마 학교|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ref> 그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를 '우리는 졸업 후 귀국하면 사관학교를 세워 干城(간성)이 될 將材(장재)를 길러내 우리 나라를 세계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였다.</ref>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ref>
 
{{인용문2|서 씨는 [[조선]]의 귀족임에도 규칙을 잘 준수하고 있다. 여타 생도와 일과를 끝내고 귀숙(歸宿)한 후에도 흐트러짐 없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다른 생도들을 책려(策勵)하며 병서 및 산술 등을 연구하고 있다.|지지신보 1884년 2월 28일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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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미국 망명 ===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 시|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ref name="조병옥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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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낮선 땅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고,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은 데다가 노동법령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임금도 못받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한다.
 
처음에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이라는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에 좌절하여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했다. 낮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아 여러번 일자리를 바꾸기도 하며 차가운 시골과 변두리의 판자집을 전전해야 했는데, 위생상태의 불결함 등으로 [[감기]]와 [[피부염]]증, [[동상]]에 자주 걸려 육체적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막노동과 잡역,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가리지 않고 이역만리를 헤매며 [[오렌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 [[가구점]] 점원, 잡화상회 점원 등을 전전하며 [[미국]]생활을 견뎌냈다 한다.<ref name="조병옥75"/>
 
고단한 [[미국]]생활에서 연락을 주고 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 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ref name="황2100">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100페이지</ref>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ref name="황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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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재학 시절 ====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ref name="daum1"/>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ref name="dong12"/> 그러던 중 어느 날 운 좋게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ref name="조선닷컴" /> 또한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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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ref name="조76">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6페이지</ref>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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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ref>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ref>,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 [[학사]](M.D.)가 되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ref name="dong12"/><ref name="조선닷컴" /><ref>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ref><ref name="조선닷컴" /><ref>귀국 후 [[한국]]에서는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가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의사]]라는 뜻의 닥터(Doctor)가 [[박사]]로 번역됐기 때문이었다.</ref><ref name="dong12"/>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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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ref name="dong12"/>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ref name="dong12"/>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시작,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때로는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한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 암스트롱|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같은 해 [[6월 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친지들을 불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ref name="조선닷컴" /><ref>이를 두고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이는 외국여성과의 국제결혼으로 그 당시 서재필은 귀국할 의사가 없었음을 알수 있다"고 평했다.</ref><ref name="naeils1213">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13호》 (서해문집, 2003) 213페이지</ref>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파일:Muriel mary Armstrong.jpg|thumb|left|160px|부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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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 계몽 운동 ====
당시 그는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조선 고종|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 중에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그에게 원한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ref>[[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일부 기록해두었다.</ref>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 위치를 알려주었으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ref> [[윤치호]]는 이를 두고 그가 냉정한 인물이라며 비토하였다.</ref><ref>
 
{{인용문2|서재필은 [[갑신정변]] 사건으로 천민(賤民)이 되어 자살한 전처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거지꼴이 된 양부(養父)가 찾아오자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냉혹하고 거만한 사람이 되었다.}}</ref>
 
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ref> 이를 본 [[윤치호]]는 그가 무례하다며 껄끄러워했다.</ref> 역시 [[연좌 제도|연좌]]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거지가 된 본부인 광산 김씨의 친정부모 김영석과 박씨 내외 역시 외면했다.<ref>장인 김영석은 [[승지]] 벼슬까지 지냈지만 [[갑신정변]]에 연좌되어 파면당하고 역시 거지가 되었다.</ref> 서재필은 김영석 내외에게 그대가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자신의 딸과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禽獸)에게 내가 왜 인사하느냐며 박대하고 내쫓았다.<ref> 양아버지와 장인, 장모를 박대하여 내쫓는 것을 본 [[윤치호]]는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ref> 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 입궐한 뒤에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1842년)|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또는 제이슨(Philip Jason), 피제손으로 지칭하였다. 피제손은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한글로 음역한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
 
==== 조선 정부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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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직후 연설에서 그는 [[조선]]이 [[단군]]이래의 4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주국임을 전제하고, 과거 [[조선]]이 대대로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의 식민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이 살 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길준]], [[박영효]], [[박정양]] 등을 만나 '[[조선]]이 [[근대화]]를 하려면 반드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중국의 노예가 아닌데도 [[중국]]에 해마다 [[인삼]]과 황금, 석탄, 여성, [[환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동시에 평민들에 대한 교육, 계몽활동과 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유길준]]에게 신문간행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였다. 이어 [[1월 19일]] [[한성부]]에서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서재필의 귀향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특히 그가 서양인 부인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서양 사람을 본다는 일 자체가 아주 드물게 있는 기이한 일이었다.<ref name="yijong42">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급진주의에서 기독교 입국론으로》(배재대학교출판부, 2005) 42페이지</ref> 거리에 백인 여자가 나타나기만 해도 구경꾼이 모여 들었을 터인데, 서재필이 서양 여자와 결혼했고, 또 그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하니 관심을 모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25살인 서재필 부인은 키가 충천하고 1미터 72센티, 피부가 희고, 머리가 갈색이었으니 장안이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yijong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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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un Chi-ho's 42 year's old.png|thumb|left|170px|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윤치호]]]]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 겸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ref name="omay0804"/> [[개화파]]정부는 개화인사 중 몇 안되는 지도자인 서재필을 [[외무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와 민씨 척족들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와 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ref name="daum1"/> 하려고 하였다. 그의 포부를 본 [[박영효]]는 5천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약속은 [[박정양]] 내각이 들어선 뒤에 이행되었다.
 
대신 그는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ref name="daum1"/> 받아 활동하였다.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과 민씨 내각의 반대를 잘 알던 그는 [[내각]]에 입각하는 대신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직]]으로 계속 돕겠다고 반복하여 개화파 정치인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다.<ref name="omay0804"/>
 
[[1895년]] [[12월]] 중순에 그가 귀국한 직후부터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ref name="황293"/>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ref name="황293"/> [[1895년]] [[유길준]]은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 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귀국 직후부터 [[신문]]은 계몽의 한 방법이라는 [[유길준]]의 설명을 듣고, 그는 신문 발간을 준비해 왔고, 국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 등으로 그는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신문 발간 계획을 위촉하였으며, 아관파천에 의해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침내 [[독립신문]]이 창간될 수 있었다.<ref name="naeils14">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13호》 (서해문집, 2003) 214페이지</ref> 그는 내무대신 [[유길준]]과 교섭, 5천원의 추가 지원 비용을 얻어내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ref name="kiristan">김경, 《한국 기독교 건국공로자열전》 (한국문학도서관, 2008) 153페이지</ref> 그는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조정이 인민의 재산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건부로 인민이 조정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백성들은 그가 소개한 [[사회계약론]]을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괴상한 신사상 정도로 취급하였다.
 
; 안경 착용과 갈등
독립신문을 창간하려고 하던 때였다. 서재필이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궁중으로 들어가는데 [[안경]]을 끼고 갔다.<ref name="yoyong155">이용선, 《조선최강상인 2 파천황》 (동서문화사, 2002) 155페이지</ref> 그가 입궐하자 입구에서는 그에게 [[안경]]을 벗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임금 앞에서 안경을 끼면 [[불경죄]]로 다스렸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ref name="yangins"/> [[조선]] 말기 이후 [[192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은 어른 앞에서 안경을 끼는 것을 무례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궐앞에 이르러 나인들이 다시 저지하였다. 나인들이 '임금 앞에서는 [[안경]]을 쓸 수 없으니 안경을 벗으라'고 했다. 그때 서재필은 '나는 [[미국]][[시민권]]을 얻은 외신(外臣)의 신분'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안경을 벗지 않고 빤들빤들한 안경을 쓴 채 고종을 알현했다.<ref name="yoyong155"/>
 
바로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짱을 낀 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물음에 그대로 말대답을 하였는데 이는 임석한 조정 대신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서재필의 말대로 그는 '외신'이니까 어쩌지 못하고 애꿎은 통역관만 그 안경 사건을 트집잡아 섬으로 귀양 보냈다.<ref name="yoyong155"/> 고종은 그 '[[안경]]' 때문에 심기가 대단히 좋지 않았던 것이다.<ref name="yoyong155"/> [[이범진]] 등은 이를 계속 소문을 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매천 [[황현]] 역시 같은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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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협회 도장.png|썸네일|오른쪽|150px|[[독립협회]] 법인 도장]]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ref> [[주시경]]은 [[한글]] 표준어와 방언, 발음 등에 정통하였으며, [[독립신문]] 발간 중에도 쉬운 단어 선정을 위해 직접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ref>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ref name="diopo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1/2011102102297.html "일본인 발음으로 영어 못 배우겠소!"] 조선일보 2011.10.22</ref>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년]] [[7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ref name="diopos"/>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ref name="diopos"/>"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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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청년 계몽과 토론 문화 보급 활동
[[파일:Independence Newspaper site.JPG|thumb|right|배재학당 앞에 세워진 독립신문사터 표지석]]
[[1896년]] 내내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비용 한푼 받지 않고 무료로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ref name="dong12"/> 다.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ref name="daum1"/> [[협성회]]에도 [[이승만]](李承晩),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志士)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그 밖에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회강연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그는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의 학생들에게 수업 이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ref name="황291">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1페이지</ref>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ref name="황291"/>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ref name="황292">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2페이지</ref> 그 순간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연설하여 우등상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다시금 느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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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ref name="sonns">[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1/19/2007111900995.html 독립문 준공 (1897.11.20)] 조선일보 2007.11.19</ref>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ref name="sonns"/>
 
후일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출신과 관련,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ref name="swis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23/2009102300254.html 한국 서양건축의 비조 사바친 베일 벗어] 조선일보 2009.10.23</ref><ref> name="swiss"/><ref>후일 [[스위스]]인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국제한국사학회]] 공동 연구자의 한사람인 [[러시아 국립인문과학대학]] 타티아나 심비르체바 [[박사]]는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따라서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한 대목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ref><ref name="swiss"/>
 
그는 사대사상의 증거인 [[한성부]] 서대문방 현저동(峴底洞)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화관]]은 조선 말기인 1897년 서재필 같은 독립협회 인사들에 의해 '독립관'(獨立館)으로 개축돼 독립협회 회관으로 쓰였다.<ref name="hyunjeo">[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5/2009121500137.html 서대문구 현저동(峴底洞)] 조선일보 2009.12.15</ref>
 
또한 독립협회보를 발간, 자유 민권활동과 참정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조선]]이 [[신라]], [[고려]], [[조선]]의 1,200년간 [[중국]]의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며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 만민공동회 개최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ref name="gaehon">유영렬, 〈독립협회의 민권사상연구〉, 《사학연구》22호, 한국사학회, 1973, 68~71쪽.</ref>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대한제국]] 조정의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미국]] [[미국 시민권|시민권자]]이므로 해코지하였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한편 서재필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배우고 유학을 가서 신문물을 보고 보는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하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한 것도 서재필이었다.
 
[[1897년]](고종 34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 서재필은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ref name="윤치호일기, 1897년 7월 30일자">윤치호일기, 1897년 7월 30일자</ref>"는 발언을 하였다. 서재필은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천부인권]])이며 아무런 잘못 없이 누구도 다른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ref> [[윤치호]]는 이를 두고 인간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발언이 너무 지나치다며 염려하였다.</ref> 한편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에서 대신의 물망에 적합한 인사들을 추천하고 그 명단에 서재필이 들어있는 것을 본 대신들은 그가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을 사주하여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을 비롯, 학생 청년들을 모아 [[배재학당]] 회관에서 토론, 토의하는 법을 비용없이 무료로 가르쳤다. 또한 [[원산부|원산]]에 있는 [[원산학사]]에도 매주 주말에 방문하여 토론 기술과 화법을 가르쳤다. 그는 배움을 청하러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신분 차별을 두지 않고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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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arge of the Rough Riders at San Juan Hill.JPG|thumb|200px|[[미국-스페인 전쟁]]]]
{{참고|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4월]] [[미국]]으로 환국,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미군]] 병원선 하지 호(號)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노동과 상점의 아르바이트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 직은 [[1914년]]까지 출강하였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899년]] [[조선]]에 있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독립협회]]가 실패했다는 전보와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참정권]] 요구 활동 등을 백성들은 사갈시하며, [[갑신정변]]을 일으키려 한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실패에 크게 좌절, 민중에 대한 실망감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서재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하숙하며 다녔던 [[윌크스베리]]에서, [[힐맨 아카데미 고등학교]] 시절의 일 년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고, [[1905년]]에는 해롤드 디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 윌크스 베리 본점을, 서재필은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고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하니 지금이라도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 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로부터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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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ref name="woisidi"/>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 2천 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ref name="woisidi"/>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던 서재필은 [[1922년]]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에 입사, 이탄뉴상회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ref name="daum1"/> 그러나 간간히 한인단체 활동에 관여하였고 수시로 자문을 청하는 [[이승만]], [[안창호]], [[조병옥]], [[허정]] 등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인해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졌다. 그는 생계 조달을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상점의 점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파산한 가정 경제력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재필은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다시 계속하기로 결심<ref name="song241">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241페이지</ref> 하였다.
 
1925년 6월, [[7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 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온 [[송진우]], [[신흥우]], 김양수, 유억겸, 김종철 등과 함께 헬렌 윤, 필지성 등을 데리고 [[7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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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작은 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ref name="song241"/> 생활비와 빚에 쪼들렸고 전기 요금과 수도 요금을 겨우 납부하는 수준에 이르자 그는 생계에 뛰어들게 된다. 후일 작은 딸 [[뮤리엘 제이슨]]은 아버지 서재필의 비서와 보좌역을 수행한다.
 
서재필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2천 달러를 빌려 차임하였다.<ref name="song241"/> 그는 이것으로 2년간의 연구비와 가족의 생활비에 충당할 것을 생각했다. 이후 2년간은 그에게 있어서 극심한 생활난의 연속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포함한 네 식구가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ref name="song241"/> 당시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고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서재필에게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ref name="song241"/> [[1926년]]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Geanes Hospital)에 취직하였다.
 
[[파일:Syngman Rhee and Seo Jae-pil.jpg|썸네일|왼쪽|140px|[[이승만]]과 함께 [[하와이]]에서 ([[1926년]])]]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그는 실질적으로 조선이 멸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부였던 인물이 사망함으로써 조선인들 사이에 구심점이 사라졌다고 봤다. [[1926년]] 봄 [[이승만]]의 초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하였다. 이때 임정의 파벌싸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서재필은 이승만이 한발 양보한다 하더라도 각 파의 파벌간의 암투를 조정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임시정부에도 연락,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단합, 단결시키기 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연합, 연맹하는 것이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임을 지적했다. 또한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 (1880년)|박용만]]파 간의 파벌다툼은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했다. 그는 계속된 파벌 다툼과 자기 이익에 골몰하는 행위로는 독립을 하더라도 그 독립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계속 [[삼일신보]]와 [[미국]]의 언론에 [[일본]]의 탄압과 만행을 알리는 칼럼과 기고문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며 조선독립을 위한 청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 공보부와 외무성,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에서의 통치가 무력 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일선 동조론]]을 내세우며 이를 일축했다.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미국]]에 암살자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 [[하와이]]와 [[필라델피아]]에 첩자를 밀파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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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과 연구 활동 =====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ref>"생계에 궁한 서재필씨 의과대학에 입학", 동아일보 1926년 11월 23일자 2면, 사회면</ref> 하고 동시에 의업을 재개하였다. [[1927년]] [[4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을 수료하였다. [[1926년]] [[미국]]에서 [[병리학]] [[전문의]] 면허제도가 시행되자 그는 [[병리학]] [[의사]] 면허에 응시하였고, 여러 번 낙방하였다.
 
[[파일:1926.11 Seo Jae-pil.png|썸네일|오른쪽|170px|[[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 중 ([[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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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를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에 전념하였다.<ref name="song248">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248페이지</ref> 큰 딸 스테파니는 [[미국인]]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었으나, 둘째딸 뮤리엘은 미혼으로 서재필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ref name="song248"/>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난 후 그는 집에 오면 여가를 이용하여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테니스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야구 같은 것으로 가족과 함께 하기도 했다.<ref name="song248"/> 그는 주말에도 놀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생활을 즐겨 채소밭 가꾸는 일에 열중하였고, 특히 그는 신문 읽기에 열심이었는데, 그것은 국제 정세의 움직임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ref name="song248"/> <ref name="song248"/> [[1945년]] 다시 성 요셉병원에서 근무하였다.
 
=== 해방과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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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나는 연로했고, 원래 지위와 권세에는 아무런 뜻이 없으며 오로지 동포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고 싶다.<ref name="dong12"/>}}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공동위원회 재개를 준비하면서, 이승만, 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재필을 급히 귀국시키고자 하였다.<ref name="roists577">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2004) 577페이지</ref> 미군정은 그의 한국 입국을 추진했고, 몇 차례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과도입법위원회|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6월 1일]], [[미국]]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당시 서재필은 [[3월]]에 비행기로 오려다가 기선을 탔다.<ref name="roists577"/> [[6월 1일]] 오후 4시, 인천항에 상륙했다.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은 일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071982&cloc=olink|article|default 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ref> 서재필은 [[인천]]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좌우에 동승하고 서울에 왔다.<ref name="roists577"/>
 
[[이승만]]은 처음에는 친히 환영사를 발표하여 [[개화파]] 선배이자 스승인 서재필을 극진히 대접하였으나, 뒤에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하지]]가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귀국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재필을 적대시하였다. [[김규식]]은 그의 귀국으로 이승만, [[김구]]의 독주가 견제되기를 희망하였다.
 
서재필의 귀국은 하지가 거의 1년 전인 1946년 8월부터 여러 차례 요청해서 이뤄진 것으로, 한때 [[존 하지|하지]]는 서재필을 [[이승만]]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이승만]]이 자신에게 [[공산주의]]자 딱지([[1947년]] [[1월 25일]])를 붙인 직후 굿펠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늙은 개자식(the old S.O.B)이 나에게 한 배신행위는 삭이기 힘들고 비통한 경험"이었다고 하였다.<ref>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649페이지</ref> 그래서 하지는 [[이승만]]의 대안 모색에 매달렸다.<ref name="kangp41"/> 그러나 서재필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직 제의에 회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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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o JP and Syngman Rhee, Donner, Hadge.jpg|thumb|left|140px|귀국 직후 [[존 하지|하지]] 사령관 및 [[이승만]] 내외와 함께]]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ref name="dong12"/> 그러나'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존 하지|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ref name="dong12"/> 그를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지도자들은 그의 발언에 수긍하였다.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의 [[윤치호]] 묘소를 참배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1891년)|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하고,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국내 정세를 접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한 것을 보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다툼은 여전하다며 한탄하였다.
 
[[7월 3일]] 하지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이라는 신설된 직책에 취임하였다.<ref name="roists577"/>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에서 잠시 숙박하다가 [[미 군정]]청에서 내준 군정청 직원 숙소로 이주하였다. 이후 [[존 하지|하지]] [[미국|미]][[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ref name="조선닷컴" />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ref name="dong12"/>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ref name="dong12"/> 을 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 과도입법의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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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내가 할 일은 다 했다.<br /><br />1948년 9월 14일}}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1949년까지 미군정은 한국 정부의 고문 임무를 띠고 주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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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이후 ===
*시신은 화장되어 [[미국]] 필라델피아 교외 메디아의 [[비브 교회]] [[공동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1969년]] 천리구 [[김동성]], [[유홍]](柳鴻) 등이 서재필박사 유해환국 봉안회를 조직하여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다는 서재필의 묘소를 수소문하기 시작하여 환국 운동을 추진한다.
 
두 딸 스테파니와 뮤리엘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만이라도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돌보게 해달라며 유골 송환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1990년]]대 다시 서재필 유골 봉환문제가 재논의되었다.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서울현충원|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서재필 유해의 국내 봉환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그의 외손자 [[필립 하디칸]](첫째딸 스테파니 제이슨의 아들)은 반대하였다. [[필립 하디칸]]은 유언을 통해 서재필 유해의 국내봉환을 반대했다.<ref name="ban1">[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4040572901 서재필선생 전명운의사/태극기 앞세우고 그리던 조국땅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따온 제목 -->]</ref> 딸 [[뮤리엘 제이슨]] 역시 "내가 사망하기 전에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고, 이후 몇차례의 추진에서도 국내 안장지 문제 등을 놓고 논의단계에 맴돌다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ref name="ban1"/> 그 뒤 서재필의 유골은 [[펜실베니아 주]] 첼턴 힐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83년]] [[뮤리엘 암스트롱]]과 친하게 지내던 현지 교민 [[장익태]](張益泰)와 [[서동성]]의 주도로 [[필라델피아 시]] 서쪽 끝에 있는 [[웨스트 라우렐 힐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장익태와 서동성은 사비로 2천 달러를 들여 웨스트 라우렐 힐 공동묘지의 두 칸을 사서 서재필과 그의 가족들을 안장하였다.<ref name="dbisp">"서재필 박사 유해 미 납골당에 방치", 동아일보 1993년 07월 06일자 31면, 사회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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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ref name="sohs280">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280페이지</ref>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ref name="ReferenceC">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406페이지</ref>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를 몹시 싫어하였다.<ref name="sohs279">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279페이지</ref>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권고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사양하였다.<ref name="sohs280"/> 종증손 중의 한 명인 서동성을 봉사손으로 들이라는 조카의 부탁도 거절하였다. 서재필은 또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ref name="sohs280"/>'라고 하였다. 그는 어설픈 [[온정주의]]와 [[가족주의]]가 사회를 폐쇄화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죽고 못살듯이 가족을 찾더라도 큰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터지면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칠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ref name="woisidi"/><ref>1994년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자신의 부모 묘소를 한번도 참배하지 않는 등 한국인으로서 동질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ref><ref name="woisidi"/> 그는 당시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대 근처에 있다가 이장된 어머니 성주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생모의 묘소에 참배하지 않았다. 종손 [[서명원]]에 의하면 이 일로 서재필의 조카들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한다.
 
서재필은 [[한국인]]의 [[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ref name="sohs279"/> 훗날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ref name="sohs279"/> 라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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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백성이 뽑은 사람이 천거 받은 사람보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나으리라 (2)”<br /><br />
정부에서 좋지 않은 일을 하든지 좋은 일을 아니하는 것은 백성의 사정을 모르는 연고요, 백성이 정부를 의심하고 명령을 쫓지 아니하는 것은 정부를 모르는 연고라. 군민간에 서로 알게 하는 직무는 관찰사와 원에게 달렸으되 근일 관찰사와 원들이 자기 직무들을 잘못하는 연고로 경향간에 통정이 못되어 의심이 서로 나고 의심이 난 즉 사랑하는 마음 이 없어지는지라.<br /><br />관찰사와 원이 자기 몸 생각하기를 임금이 백성에게 보내신 사신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 몸을 백성보다 높은 줄로 생각하며 백성 대접하기를 무리하게 하고 정부 명령을 자세히 전하지 못하는 고로 백성이 정부도 모르고 정부에서 보낸 사람을 미워하니 어찌 군민간에 교제가 잘 되리오.<br /><br />이런 자리 뽑기가 대단히 어려운 즉 정부에서 사람을 골라 보내지 말고 백성더러 자기 관찰사와 원을 투표법으로 골라 정부에 보하면 정부에서 그 사람을 시켜 보내 그 사람이 일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정부에 책망이 없을 터이요 또 이렇게 뽑은 사람이 대신이나 협판이 천거하는 사람보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나으리라.(독립신문 1896.4.16일자 5호 논설)<ref name="jhajhi"/>}}<ref name="jhajhi"/><ref name="jhajhi"/><ref>한양대학교 조창현(趙昌鉉) 교수(지방자치면구소장)는 “3권 분립 개념이 없던 당시에 도지사와 군수에 해당하는 관찰사와 원을 선거로 뽑자는 것은 단체장을 직접 선출하고 의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지자제의 전면실시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이라고 설명했다.</ref><ref name="jhajhi"/><ref> 또 서울대 장달중(張達重) 교수(정치학)는 프랑스 정치학자인 토크빌이 19세기 미국 민주주의의 ‘자발적인 사회조직’ 과 ‘평등’ 개념을 높이 평가한 사실을 예로 들며 “미국 유학파인 서재필 박사도 지자제의 근간인 ‘자발적인 사회조직’의 개념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ref><ref name="jhajhi"/>
 
;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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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형 [[서재춘]]의 손자 [[서태원]](전 [[감신대]] 교수)은 [[한국전쟁|6·25 전쟁]]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어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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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모 : 이름 미상
** 이복형 : 서재형(徐載衡, [[1851년]] ~ [[1884년]] [[12월 13일]]<ref>매천 황현은 그를 친형으로 오인하였다.</ref>, 처형되었다.)
 
* 처 : 경주이씨(慶州李氏, [[1860년]] ~ [[1880년]](?)), 자녀 없음
* 처 : 광산김씨(光山金氏, [[1862년]] ~ [[1885년]] [[1월 12일]], 음독자살), [[김영석 (1837년)|김영석]](金永奭, [[1837년]] - [[1902년]], 자는 보경(保卿))과 반남박씨(潘南朴氏, 박호수(朴鎬壽)의 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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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는 "그는 이 땅에서 다시 견줄 바 없는 개혁, 구국, 자유, 독립의 애국투사였으며 조국의 장래와 동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 봉사자였다.<ref name="songgun316"/>"라고 하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초당파적 정치가'를 염원하는 중도파에 의해 1년2개월 동안 귀국했던 서재필(徐載弼)은 조국의 통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최후의 봉사를 한 셈이었다고 평가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24/2008112401914.html "대한민국은 알고 있나,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조선일보 2008.11.25</ref>
 
*대한제국 정부에서 추방당하면서 2만 4,400원이라는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한 것에 대해 서울대학교 교수 신용하는 "이 부채(서재필이 받아간 2만 4400원을 가리킴)는[[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충분히 청산하였다.<ref name="shimyong66"/>"며 "이때 그는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 여기서 그의 헌신적 애국심과 그의 인품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 그가 가져간 2만 4,400원은 비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ref name="shimyong66"/>"고 평하였다.
 
*사학자 [[최태영]]은 "일부에서는 서재필선생이 미국 국적을 가졌고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근대화와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f name="pions"/>"며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대전대 총장을 역임한 이광린(李光鑛)과 언론인 송건호(宋建鎖)는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평하였다.<ref>김욱동, 《소설가 서재필》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 20페이지</ref> 그리고 (학자들 중에도) 서재필을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와 견주어 '한국 의 볼테르'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ref>최진섭, 《한국언론의미국관》(살림터, 2000) 157페이지</ref>
 
; 비판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에 의하면 "그에게서도 역시 강렬한 양반의식(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낄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ref name="her1">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80페이지</ref> 허정에 의하면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81페이지</ref> 또한 허정은 그가 차갑고 냉소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ref name="woisidi"/>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그는 [[독립신문]] 설립 과정에서 단 한 푼의 자본을 댄 바가 없었음에도 신문사를 자기 명의로 등록했으며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소유권을 일본에 양도하려 했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운영만 [[윤치호]]에게 넘긴 채, 자신은 하는 일 없이 편집인의 명목으로 많은 연봉을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ref>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3: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인물과사상사, 2007) 173페이지</ref>"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가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1994년 유골 송환 직전 TV에서 방송된, 미국 메디아에 있던 그의 유골항아리)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ref name="woisidi"/>'고 비판했다. 이어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고 하였다.<ref name="woisidi"/>
 
*또, 주진오는 "'독립신문' 등을 통해 그는 동학혁명이나 의병 운동을 철처하게 비난하고 있으며 열강의 이권 침탈과 시장 개방 요구를 '문명화'로 합리화하거나 옹호했고 심지어 독립신문사에서 각종 서양 물품을 판매하기도 했다.<ref>강준만, 《권력변환:한국언론117년사, 1883-2000》(인물과사상사, 2000) 200페이지</ref>"고 비판하였다.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ref name="woisidi"/>'고 지적하기도 했다.
 
*방선주 박사(한림대 교수)도 ‘서재필은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의 처신 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하였다.<ref name="woisidi"/>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부정적인 평가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ref name="sss1"/>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ref name="woisidi"/>'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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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 ===
차갑고 냉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許政)은 후일 그가 매우 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하였다.<ref name="her1" /> 그의 독립심과 투지는 대단하였다. [[박영효]]나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ref name="her1"/> 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ref name="her1"/> 고 하였다. 또한 개인주의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조선 체류 중 서재필은 죽은 부인의 묘를 한번도 찾아 돌보지 않았는데, [[1898년]] [[1월 15일]], [[갑신정변]]으로 고신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된 서재필의 전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그에게 2달러의 돈을 주고 쫓아냈다. [[윤치호]]는 이를 보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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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과 의혹 ==
; 친일 지원 논란
[[2005년]] 언론인 박선협은 친일 의혹을 제기하였다. [[2005년]] [[2월]] 박선협은 청와대에 ’신문의 날’을 혁파해야 한다는 민원을 제출했다. 독립신문이 친일 논조를 펼쳤고, 창간을 주도한 서재필이 친일 행각을 벌였으므로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제정된 신문의 날은 다른 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ref> 박선협은 3월 15일 연합뉴스에 '광복 60주년의 해를 맞아 광복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 청와대에 민원을 냈다'면서 '매국노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당시 서재필과 독립신문은 일본의 힘을 빌려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고 밝혔다.</ref><ref name="chin">[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31670041 '신문의 날'도 친일 논란 휩싸이나?] 조선일보 2005.03.16</ref> 이에 청와대는 "관련단체에 넘겨 검토하겠다"는 회신을 보내는 한편 문화관광부에 이관했으며, 문화부는 신문협회ㆍ편집인협회ㆍ기자협회에 검토 의견 제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ref name="chin"/><ref name="chin"/><ref name="chin"/><ref>당시 [[문화관광부]]의 김정화 사무관은 “신문의 날은 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이 아니라 민간단체가 제정해 기념하는 날이어서 언론계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ref><ref name="chin"/><ref>박씨의 주장에 대해 언론단체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편집인협회의 최문기 사무총장은 “이사회에 보고해 논의는 하겠지만 신문의 날이 큰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으며, 이천구 기자협회 사무국장도 “전문가에게 자문해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ref><ref name="chin"/> 관련학계에서도 신문의 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는 부정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ref name="chin"/><ref name="chin"/><ref>정진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문의 날은 서재필 개인이 아니라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는 날이며,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지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류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ref><ref name="chin"/><ref>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김민철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며 "독립신문의 의미가 과도하게 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신문의 날]]을 바꿀 정도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ref><ref name="chin"/>
 
; 파산 원인과 경제공황론
일설에는 그의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 투자가 아니라 [[미국 대공황]]의 영향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 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다.<ref name="woisidi"/><ref name="woisidi"/><ref>주진오에 의하면 "1990년대 초의 한 연구는 1921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1993).</ref><ref name="woisidi"/>
 
; 한국어 망각, 국적 논란
그는 [[1895년]] 귀국했을 때나 [[1946년]] 귀국했을 때 자신은 [[한국어]]를 잊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어로 대화를 하였기에 그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잊었는가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었다.<ref> [[1946년]] 귀국 이후 한 방송국에서 [[한국어]]로 방송하는 것이 녹음되어 기록이 남아 있다.</ref>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ref name="woisidi"/>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ref name="woisidi"/>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 하와이 ·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ref name="woisidi"/>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貴 政府’라 부르고 있다. (<독립신문> 1898. 5. 5).<ref name="woisi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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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 활동 ==
*[[1962년]] [[3월]] [[한국]] 독립 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수훈 대상자로 지정되었으나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1970년]] [[12월 13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197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서재필 기념재단]]이 만들어져 의료, 봉사, 장학 및 교육,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아]]에 서재필 박사가 살던 집을 [[서재필 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 D.C|워싱턴]]에 동상이 세워졌고<ref name="조선닷컴" /><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3010175 서재필 동상 내달 워싱턴서 제막], [[동아일보]]</ref> 워싱턴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다.<ref name="조선닷컴" />
 
*[[197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서재필 기념재단]]이 만들어져 의료, 봉사, 장학 및 교육,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아]]에 서재필 박사가 살던 집을 [[서재필 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 D.C|워싱턴]]에 동상이 세워졌고<ref name="조선닷컴" /><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3010175 서재필 동상 내달 워싱턴서 제막], [[동아일보]]</ref> 워싱턴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다.<ref name="조선닷컴" />
 
*[[1991년]]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9(구. [[전라남도]] [[동복군]] [[문덕면]] 가내리 529) 근처인 1024번지에 서재필기념공원이 건립되었다.<ref name="sss1"/><ref name="나라사랑">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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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2008-08-09
|언어 = 한글
}}</ref> 기념공원은 넓이 4만 5,700제곱미터이며, 그 안에는 당시의 외가를 복원한 ‘서재필기념관’이 세워져 있고,<ref name="나라사랑" /><ref>[[2001년]] [[8월]] 착공한 서재필기념관은 [[2008년]] [[7월 8일]] 7년만에 완공되어 개관하였다.</ref><ref name="나라사랑" /><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707027010 “서재필 박사 큰 뜻 함께 느꼈으면…” ], [[서울신문]].</ref> 그밖에도 독립문, 사당, 조각공원, 동상,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서 있다.<ref name="나라사랑" /> 그 해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전라남도청]]에는 신설 강당 중 서재필실을 개관하기도 했다.
 
*[[1996년]] [[3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발되어, 그해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1996년]] [[4월 1일]]에는 한국 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서 한국프레스센터 등의 주최로 <서재필과 독립신문>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2000년]]에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홍선표]]가 엮은 'My Days in Korea'가 발간되었다.<ref name="syunpyo">[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0030670374 학술신간 산책] 조선일보 2000.03.06</ref> 이는 서재필이 1896년부터 1948년 사이에 국내외 신문과 잡지 등에 영문으로 발표한 수필 강연문 방송원고 등을 모은 것이다.<ref name="syunpyo"/> [[2008년]] [[5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서재필 광야에 서다》(고유, 2008)가 출간되었다. 이는 곧 제1회 디지털 작가상 역사 팩션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2002년]] [[4월 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의 어록비가 제막되었다.<ref name="seoos">[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040470246 서재필 박사 어록비 제막식 열려]</ref> 어록비 전면에는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요…”로 시작되는 76자의 글이 새겨졌다. 이 글은 서 박사가 미국에서 육성 녹음해 [[1949년]] [[3.1 운동]] 3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공개된 연설문 ‘조선동포에게 고함’의 일부이다.<ref name="seoos"/> 서재필의 [[조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육성 연설문 내용의 일부가 녹음되어 현재 전하고 있다.
 
*[[2004년]]부터는 서재필 기념재단에 의해 서재필의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수여되고 있다. 그가 만년에 거주한 저택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제이슨 하우스는 딸 [[뮤리엘 제이슨]]이 계속 거주하였고, 남편 사별후 혼자된 장녀 [[스테파니 제이슨]]이 함께 살았다. 두 딸이 죽자 서재필 저택 제이슨 하우스는 한인사회에 의해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4년]] 서재필 기념관이 그의 저택 제이슨 하우스에 개관되었다.
 
*[[2005년]] [[3월 3일]]부터는 [[논산시]]에서 서재필 박사 추모제를 거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021960 송재 서재필 박사 추모제]</ref> 이후 매년 [[3월 3일]] 논산 연무읍에서는 서재필 추모제가 거행된다. 구자곡면 화석리 등에는 서재필의 부모 묘소와 형 서재춘 내외의 묘소가 소재해 있다. 본래 그의 가족들의 묘소는 [[육군훈련소]] 자리 근처에 소재해 있었으며 어머니 묘소는 연무대 자리에 있었는데, 후에 논산 제2훈련소가 들어오면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옮겨졌다 한다.
 
*서재필의 생부 [[서광효]]가 살던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1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었다. 방치된 서재필의 본가는 [[2006년]] [[2월]]부터 [[논산시]]의 주도 하에 복원 사업이 계획<ref>[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533 <논산> 논산시 서재필박사 생각 복원]</ref>, 추진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061461 서재필박사 생가 복원된다] 대전일보 2006.02.17</ref>
 
*[[2008년]] [[5월 6일]] 워싱턴 DC 소재 주미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서재필 동상 초석 정면에는 '최초 한국계 미국인―한국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개척자'라고 씌어 있다.<ref name="dong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2/2008050201547.html 서재필 박사 동상 워싱턴서 6일 제막] 조선일보 2008.05.02</ref> 전신 청동상은 이재길 전남대 미대 교수가 조각했다. 좌측 면에는 [[이은상]] 시인이 서 박사 생애를 압축한 한글 헌사를 담았고, 우측 면에는 서 박사 전기를 저술한 [[이정식]]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영문 헌사가 있다.<ref name="dongs"/> [[2011년]]에는 서재필 언론문화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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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이규완]]은 서재필의 제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칼을 보니 애국심과 의기가 쭉 내비쳤다. 그만 달려들어 그 칼을 빼서 들고 당장 일어나면서 "여보, 그까짓 것 내가 하겠소. 오늘날 국가의 중대한 일은 사람 둘만 죽이면 된다고 하니, 내가 그까짓 것을 못하겠소. 내 당장에 가서 [[민영익]]이 목을 베고, 이 [[이규완]]이도 그자리에서 죽을 테니 걱정 마시오."하면서 칼을 끌고 대청을 뛰어나갔다. 그러자 그는 황황해서 쫓아 나오며 "여보, 잠깐 들어오구려. 남의 말이나 똑똑히 듣고 가구려"하며 한사코 방으로 다시 끌고 들어가더니 내 두 손목을 꼭 붙잡고 하는 말이 "여보, 장군님. 용서하시오.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은 장군님의 담용을 시험해 보느라 그리 하였으니 용서하시오."하기에 "예, 여보, 다시는 그런 장난 마시오."하고 말을 마치고 칼을 도로 주었다.<ref name="shin363"/>'한다. [[이규완]]은 김옥균이 자신을 시험한 것으로 눈치챘다. '이튿날 [[김옥균]]의 집에 갔더니 김이 버선발로 쫓아나와 나를 맞이하면서 "이 장군님, 이 장군님"을 계속 부른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 어젯밤 서재필의 연극은 김이 시킨 것이 분명하였다.<ref name="shin363"/>' 한다.
아버지 서광하의 묘소는 [[충청남도]] 은진에, 어머니 성주이씨의 묘소는 [[논산군]] [[연무읍]] 죽평리(현재의 [[연무대]] 자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육군훈련소|육군 제2훈련소]]가 입주하면서 그 근처로 이장되었다. 배우자 광산김씨의 시신 역시 수습되어 [[논산군]] 연무읍 죽평리 훈련소 자리 뒤편 야산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동생 [[서재창]]의 시신과 굶어죽은 어린 아들, 그리고 서모가 낳은 이복 동생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묘소도 없다. 뒤늦게 살아남은 맏형 [[서재춘]]의 아들들과 동생 서재우의 아들이 [[서광하]] 내외의 묘소를 돌보았다. 그러나 이 일로 큰 상처를 받은 서재필은 귀국해서도 부모의 묘소나 전처의 묘소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