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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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88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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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원인 = 병사(소갈증과 신장풍의 합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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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정조 12) [[8월 22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조선]] [[조선 인조|인조]]의 후손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대손인 [[진사]] [[이병원]](李秉源)과 [[통덕랑]] 정의환(鄭義煥)의 딸 연일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 연일정씨를 잃고, 아버지 이병원은 광주김씨 김진구(金鎭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원래 이름은 채중(寀重)이었는데, 순조 때인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ref name="ㅇㅇ">{{뉴스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82%A8%EC%97%B0%EA%B5%B0&keyword=%EB%82%A8%EC%97%B0%EA%B5%B0|제목=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남연군 검색 결과|확인일자=2009-01-30}}</ref> [[인평대군]]은 다시 자신의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는 본가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 이전의 7대손이 된다. 후일 [[흥친왕]]의 일대기를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 정리한 이희공실록에도 [[인평대군]]이 인조의 아들이라는 점을 서술하면서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가 된 점을 기록해두었다.
그의 가계는 [[능창대군]]의 양자인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일찍 요절한 [[복녕군]]의 5대손이다.<ref>호적상 [[조선 원종|정원군]]-[[능창대군]]-[[인평대군]](양자)-[[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원-남연군으로 이어진다.</ref> [[복녕군]]의 가문은 [[조선 숙종|숙종]] 때의 [[삼복의 변]]에는 연루되지 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과 생부 이병원은 평민 신분이었고,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판]]을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 [[이병원]]은 훗날 관직이 없이 [[진사]]로 사망하게 되지만 특별히 [[증직|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초기에 그는 봉서 [[심낙흥]](鳳西 沈樂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후일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는 자신의 문집 중암집에 [[심낙흥]]의 행장을 기록했고, 성재 [[유중교]](省齋柳重敎)는 심낙흥의 묘비문을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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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한학을 하던 그는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넷째 아들의 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는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21년]](순조 21)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4월 10일]]에 [[효의왕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사망하자 남연군은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고, [[수릉관]](守陵官)에 겸임되었다. 그러나 양어머니 남양홍씨의 상을 당하여 그해 [[11월 13일]] 수릉관에서 면직되었다. 후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ref>[[민유중]]의 형</ref> 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다시 정조의 묘 건릉 수릉관이 되었다가 건릉의 수릉관으로 재직하는 공로로 건릉 수릉관 재직 중인 [[1822년]] 의덕대부, 이후 수릉관 재직 공로로 [[1825년]] [[1월 12일]]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6년 1월 선농단초헌관, [[1828년]](순조 28) [[4월]] [[청나라]]에 진하사가 파견되자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부사(副使) 이규현(李奎鉉), 서장관(書狀官) 조기겸(趙基謙)을 대동하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8월 12일]]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청나라]] 황제의 친필을 [[조선 순조|순조]]에게 전달하였다.<ref>순조 30권, 28년(1828 무자 / 청 도광(道光) 8년) 8월 12일(기묘) 1번째기사, 진하 정사 이구 등이 [[청나라|청]] 황제가 친신을 보낸 것에 감사를 표한 사실을 아뢰다</ref> [[1829년]] [[3월]] [[조선 영조|영조]] [[조선 진종|진종]], [[조선 정조|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ref>순조 30권, 29년(1829 기축 / 청 도광(道光) 9년) 3월 6일(경자) 2번째기사, 남연군 이구가 영조·진종·정조 어필의 간행을 건의하다.</ref>
[[1828년]](순조 28) [[2월 1일]] 장남 [[흥녕군]] 이정응이 19세로 요절했고 [[1831년]]에는 부인 여흥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순조 32) 종묘, 영녕전 춘향대제(宗廟, 永寧殿春享大祭)에 인의인헌관으로 참석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1833년]] [[2월 22일]]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11월 13일]] [[조선 순조|순조]]가 사망하자 왕세손 [[조선 헌종|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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