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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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밀양 박씨|밀양]](密陽)
| 출생일 = [[1901년]] [[2월 15일]]
| 사망일 = {{사망일과 만나이나이|1970|1|22|1901|2|15}}
| 종교 = [[무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시메온)
| 배우자 = [[문화 류씨|유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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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의 예명은 상만(相萬)으로 경상북도 선산에서 (현,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으며, [[밀양박씨]] 가문으로 경주 부윤 수홍공(慶州府尹 守弘公)의 10세 손이며, 항일 의병운동가인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1910]]년 한일병탄(倂呑) 이후 부친인 박윤하<ref>{{뉴스 인용|제목 =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 |url =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912.010110745450001 |출판사 = 영남일보 |저자 = 이하석 |날짜 = 2012-09-12 |확인날짜 = 2016-07-18}}</ref> 의 항일 의병 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1912년]]4월 부친을 따라 만주 봉천성 청원현으로 건너갔다.
 
==== 청소년기(1913~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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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1924년]] 6월 1일 여순 암살현장 사형선고문}}
 
 
[[대련]](大連)에서 [[이등박문]](일본식이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녀]]이자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를 암살 시도 하였으나 실패했으며,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도 암살 시도 하였으나, 부상을 입힌채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이런 위압감으로 배정자는 은퇴하게 된다.
 
 
1924년 6월 7일는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은 중대장 김명봉(金鳴鳳)으로 부터 정갑주, 최정규와 기타 친일파들을 죽이라고 명을 받고 봉천성에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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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가족이 이불 속에 숨어 있었던 상황으로 여러 발의 총격으로 그의 장모 이씨는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처 허균(허윤, 원식(元植)이라는 자료도 있음)은 총상 몇 일 뒤 사망하였다. 이때 [[최정규]]는 2층 책상 밑에 숨어서 화를 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거사후 김광추가 중국여관에서 작성한 사형 선고문을 대문에 붙였다.
 
 
1924년 6월 7일 만주에 있는 펑톈(奉天, 봉천) 일본[[총영사관]](總領事館)을 습격,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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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저녁 중국인이 운영하는 대남관동흥려관이라는 여관에 자리를 잡은뒤,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 요정인 [[금정관]](金井館)에 침입, 군자금 삼백엔(약 4천만원)의 거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중국,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김광추]]는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하였고,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ref name="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912.010110745450001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ref>
 
일본 경찰은 그날 현장에서 증거물로 권총 세자루, 실탄 106발, 폭탄 한 개, 이들이 작성한 사형 선고문 여러장을 압수했으며, 체포된 [[박희광]]과박희광과 [[김병현]]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간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켰냈다고 전해진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 name=newsView&newskey=20120912.010110745450001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ref>
 
이때 거사의 공범으로 조직원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성 기자인 [[신명구]]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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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순감옥 수감생활 (1924~1943) ====
 
박희광은 1924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심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27년 뤼순(旅順)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뤼순감옥]]에서 [[신채호]]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ref>[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492390&sid=E&tid=2 대륙횡단철도를 가다 (하) 100년 전 선조들이 떠났던 항일운동의 길,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동북3성 중국철도 답사] </ref> [[신채호]]는 1936년2월21일 감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은 [[일본천황]](裕仁) 즉위와 황태자 출생 때 두 차례 감형되어 18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1943년 3월 출옥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뤼순 감옥의 ‘독립운동가 유물’ 첫 한국 나들이 |url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714010324270980010 |출판사 = 문화일보 |저자 = 엄주엽 선임기자}}</ref>
 
==== 김구 선생과의 만남과 이별 (1943~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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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좌•우파의 갈등이 고조된 1943년에는 민혁당이 김구(金九)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미수로 끝났다
 
 
==== 말년기 (1949~1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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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시 칠성동(대구역 주변)에 정착하였으며, 짐수레(손수레) 10여 대와 설비를 구입하여 고아들에게 국화빵(풀빵)과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어 생활 할 수 있게끔 자립을 지원 하였으나,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쉬는 날이 많아 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든 생활을 겪어야 했다.
독립운동 업적 증명의 경우, 가족이 없거나, 비밀 작전, 소규모 전투에 참여한 경우 전투로 인한 총상, 동료의 증언, 당시 기사에 이름이 언급 되었거나 다른 개관적인 증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면,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아 업적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옥살이로 인해 오히려 범죄자로 오해받기도 하여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척된 부와 인적 네트워크 등을 통해 오히려 [[기득권]]층에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555068&cp=nv 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6천억이 주식… 친일파 등 전범기업에 투자해 치부]</ref> <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190 박근혜 정부의 ‘역사전쟁’이 시작됐다]</ref>
 
박희광의 업적은 정부와 학계,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 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 독립신문 등의 신문기사 자료들이 모아지면서 그의 행적이 증명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3월1일 삼일절 행사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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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아버지 : [[박윤하]], [[의병운동가]], 일제가 작성한‘독립운동 자금모집사건’에 대한 첩보 자료에 [[김동삼]]과 함께 관련자로 거론 됨<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 name=newsView&newskey=20120912.010110745450001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ref>
* 부인 : 유문기
** 아들 : 박근용(광복회 대구수성구지회장), [[박정용]](박희광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210&yy=2011 '독립투사 박희광 의사' 연구로 학사학위 영남대 박정용 씨]</ref>, 박선용, 박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