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삼국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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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황실 성씨로서 ===
유언의 조상은 [[전한]] [[전한 경제|경제]]의 [[아들]] 노공왕(魯恭王) [[유여 (사람)|유여]]의 후손으로 [[원화 (후한)|원화]] 연간에 [[강하군]] 경릉현으로 이주하였다. 젊은 [[나이]]부터 [[주 (행정 구역)|주]][[군 (행정 구역)|군]]에서 관리로 근무하였고, 종실인지라 중랑(中郞) 혹은 낭중<ref>《삼국지》 유언전은 중랑, 《후한서》 유언전은 낭중</ref> 으로도 일하였다. [[160년]]([[연희 (후한)|연희]] 3년)<ref>《후한서》7권 본기 제7 [[효환제]] 유지 연희 3년</ref> 스승 [[축염]]<ref>[[배송지]] 주석, 《삼국지》31권 촉서 제1 유언</ref> 이 죽자 관직을 떠나 [[영천군 (중국)|영천군]]의 양성산(陽城山)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후 [[사도 (관직)|사도]]부(司徒府)에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추천됐으며 [[낙양]][[현령]], [[기주]][[자사 (관직)|자사]], [[남양군 (중국)|남양]][[태수]], [[종정 (관직)|종정]](宗正)을 거쳐 [[태상 (관직)|태상]]까지 올랐다.
 
=== 야망을 숨긴 채 입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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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세력 구축 ===
당시 익주는 전임 자사 극검(郤儉)<ref>《후한서》 영제기와 유언전에서는 치검(郗儉)이라 하였으나 《삼국지》 유언전과 《자치통감》을 따른다.</ref> 의 실정으로 마상(馬相), 조지(趙祗) 등이 스스로 [[황건적]]이라 칭하며 [[광한군]] 면죽현(綿竹縣)을 중심으로 들고일어나 광한군, [[촉군]], [[건위군]], [[파군 (행정 구역)|파군]]을 휩쓸던 것을 익주종사(―從事) [[가룡]]이 막 평정한 터였다. 가룡을 교위(校尉)로 삼고 주도는 면죽으로 정해 관대하게 위무에 힘쓰며 민심을 모아 슬슬 독자 세력을 꾀하였다.
 
남양과 [[삼보]] 등지에서 유입된 수만 가를 친위 세력화하여 동주병(東州兵) 내지 동주사(東州士)라 불렀다.<ref name='민법 제1060조'>[[상거]], 《[[화양국지]]》5권 [[공손술]]유이목지</ref> [[장로 (후한)|장로]]는 독의사마(督義司馬)에 임명했는데 그 [[어머니]]가 동안이면서 귀도(鬼道)를 일으켜 유언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장로는 별부사마(別部―) 장수(張脩)와 함께 병력을 끌고 가 [[한중군|한중]]태수 소고(蘇固)를 습격해 죽이고 야곡(斜谷)을 차단했으며 장수까지 [[살해]]해 그 무리를 흡수하였다. 유언은 [[오두미도|미적]](米賊)이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됐다고 상서하는 한편 유력 [[호족]]인 파군태수<ref name='민법 제1060조' /> 왕함(王咸), 임공[[현령|현장]](臨邛縣長)<ref>《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 ; 배송지 주석, 《삼국지》31권 촉서 제1 유언에서 인용</ref> 이권(李權) 등 십여 명을 숙청해 익주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1년]]([[초평]] 2년) 이에 반발해 [[무기]]를 든 가룡과 건위태수 임기(任岐)도 진압하고 그 [[목숨]]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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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75권 열전 제65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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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세기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