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충무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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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현종]]때는 [[경칩]]과 [[상강]] 두차례에 걸쳐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6개 부군현 관원들이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모셨으며, [[조선 정조|정조]] 15년(1791)정조께서 직접 탄보묘(誕報廟)<ref> 큰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 </ref>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군 [[등자룡]]을 함께 모시게 하였다. [[등자룡]]은 [[진린]]의 부장으로 70세 노장으로 [[이순신]]과 같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전사한 [[명나라]] 장수 이다.
 
[[일제 강점기]]때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의하여 관왕상과 위패를 비롯하여 유물(투구, 서적, 벽화, 현판)일체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고금도 [[유림 (유교)]]이 중심이 되어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여 현판을 충무사로 바꾸어 충무공을 정전(正殿)에 모시게 하였다. [[1959년]]에는 [[이순신]]의 보좌관인 조방장이며 당시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모시고 매년 [[4월 8일28일]] 충무공 탄신기념제와 [[11월 9일]](음력} 순국제(殉國祭)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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