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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84C 무렵 지어진 알렉산드리아 뮤제이옹(Museion of Alexandria)는 박물관의 고전적인 기능을 처음으로 갖추었다고 추정된다. 이곳은 알렉산드리아의 원정 이후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왕이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의 유언에 따라 조성한 것으로, 부왕이 사용하던 물건과 예술품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후일에는 신전으로 이용되거나 학자들이 문예와 철학을 연구하는 장소가 되었다.
 
<blockquote>고대 그리스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대왕의 사후 지속된 헬레니즘 시대에이르러 미술품의 수집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이는 이후 로마시대에 이르러 세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져 복제품이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 군사들이 정복한 지역의 전리품과 미술품 등을 수집하여 가정에서 진열하게 됨으로써 사립박물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신전을 공개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뮤지움(museum)' 이란 단어를 진리를 탐구하는 토론장소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blockquote>
 
==== 중세 사원 박물관 ====
중세 유럽에서는 주로 교회에서 일련의성서 유물을 중심으로 수집하였으며, 귀족이나 부호의 후원으로 수집되었다. 그러나 사유재산에서의 출발로 인해 수집기능은 있었으나 고전적인 박물관의 기능은 없었으며 흥미 위주의 전시를 하고 고가의 입장료를 징수하는 등의 폐단이 존재하였다.
 
==== 르네상스 시대의 박물관 ====
르네상스 시대에는 학술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아 수집된 유물의 내용과 유형에 변화가 생겼다. 이 시기 미술과 작가에 대한 후원이 가장 두드러 졌는데 특히 메디치(Medico)가의 후원자 역할은 박물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귀족들은 예술작업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가를 선정하여 자신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하고, 거장의 작품들을 모으기도 하였다. 미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으며 소장품을 관리하기 위한 박물관을 짓고 미술가를 초빙하여 조언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물관 경영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실무경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수집에 대한 열망이 과열되면서 로마 인근지역을 대대적으로 발굴하는 등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 박물관의 관람객은 일부 귀족과 특정계층에 한정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박물관(museum)'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용어는 코시모 디 메디치(Cosimo de Medici)의 손자인 로렌조 메디치(Lorenzo de Medici)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 근대 공공 박물관 ====
근대에 이르러 박물관은 공공 박물관의 형식으로 변화하였으며 일반 대중들의 관심도 증가 하였다. 궁정, 귀족들이 근대적 시민혁명을 거치며 자신의 의도에 따라 소장품을 개방하거나 개인, 국가, 공공단체들이 공익을 위한다는 의도로 수집을 했던 시점이었다. 공공 박물관은 국가나 공공단체가 설립, 운영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 뿐만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박물관을 공개하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공 박물관의 설립이 시민의 취향을 존중하기보다는 기업홍보와 조세감면 혜택, 정치적, 과시적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비판이 존재하였다.
 
==== 대학박물관과 국립박물관 ====
시민 혁명을 거치면서 박물관은 종래의 학자나 예술가 등 특정 계층을 위한 학술연구기관의 성격을 보였으며 나아가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영국의 경우, 1845년 박물관령의 공포로 박물관이 비로소 공공기관의 모습을 갖췄으며, 슬론 경(Sir Hans Sloane)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대영박물관이 1753년에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 이후 귀족의 전유물을 시민 전체의 것으로 돌려, 이를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이해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프랑스 왕립정부는 1750년 부터 룩셈부르크 왕궁을 국립 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였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 궁에 왕긍 소장품을 옮겨 르부르 박물관을 설립, 일반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이와 같은 왕립 박물관들은 후일 국립박물관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박물관의 증가는 일반 대중의 사회 교육과 문화적 참여권의 확대에 기여하였다. 또한 박물관의 보편화와 대중화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산업혁명에 따른 부의 축적, 대중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세기에는 전문 박물관이 형성되었다. 19세기 이전의 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의 성격을 지녔으나 과학의 진보로 수집품이 늘고 분류와 정리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799년 파리 이공학 박물관, 1807년 덴마크의 고고학 박물관이 그 예다. 19세기 박물관은 그 설립 목적이 신흥 도시의 힘을 과시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박물관 들은 건물이 대체로 화려하며 장식이 많다.
 
미국의 최초 대학박물관은 1805년에 설립한 펜실베이니아 에술원이라고 추정되며, 1876년 필라델피아의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 대 박람회와 1851년 런던의 대박람회의 결과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보스턴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이 시기의 박물관은 일반 대중의 지식개발을 돕는 시민의 교육기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기존에 있엇던 소수의 특정계층을 위한 박물관의 이념은 '공공성'을 부각하며 대중 친화적인 박물관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 한국의 박물관 ===
 
==== 삼국시대 ====
수집과 보관의 기능을 중심으로 보면 백제 진사왕 7년(391년) 궁실을 중수하여 못을 파고 동산을 갖추어 진기한 짐승과 식물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 고려시대 ====
장화전이라고 하는 곳에 나라의 보물을 저장하고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고 하며 예종 16년에 '송나라에서 보내온 선화를 선시 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선시'라는 용어가 따로 있었음을 알수 있다.
 
==== 근대박물관 ====
1908년 어원사무국을 설치하여 고려자기를 비롯한 물건들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왕가박물관은 근대적 의미의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으로 추정되며 1909년 창경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동시에 박물관도 같이공개되었다. 1909년 퇴위한 고종이 덕수궁에 고관 대작과 외국 사신들이 선물한 진귀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석조전을 건립하였다. 1938년 덕수궁이 공개되면서 석조전에 일본의 근대 미술을 진열, 상설 미술관으로 기능했으며 회화, 조각, 공예로 분류, 전시하였다.
 
==== 지방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