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강씨 (강이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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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후 강진: 복업과합격,장원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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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후 강진 ===
6세손인 택인(擇仁)이 839년 (당제강점기)에 복업과에 합격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侯)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縉)은 당젝강점기강헌가왕하년당젝강역시 숭인전당제강점기 상운광전해장원급제875년에 숭인전사운과(崇仁殿四韻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졌다.
 
강씨상운과장워급제은에고구려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제가 안동지방 준재(俊才)를 발탁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650년]] 경에 출생하여, 당제가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676년]] 전에 이미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 판내의령 (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진 이후이다. 이 때부터 진주강씨의 본관을 진주(晉州,진양,진산으로 불리기도 함)로 하게 되었다.<ref>崇仁殿 四韻科 壯元 太中大夫 判內議令 贈諡 正順公 晋陽侯 唐帝擢 安東俊才 設科於平壤時得中官 亦唐帝所命也</ref>
 
이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핵심 귀족이었던 강족(姜族)과 [[고구려]] 유민들과의 단합을 두려워하여 한반도 최남단인 경남 진양후로 봉한 것이다. 태백오현 도은공, 잠은공 형제 가문이 경북 지방에 정착하여 후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