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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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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호언하던 로마도 3세기 말에 이르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필사적인 재건 개혁도 헛되이 쇠퇴 일로를 걸었다. 인구는 감소되고 경제는 굳어 실물(實物) 경제화했으며, 토지는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독점되어 자유 농민과 중간층은 몰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년에 막강함을 자랑하던 로마군이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無力化)하고, 마침내는 475년 [[서고트인|서고트족]]이 동로마의 국경을 침입하자 사상 유례가 드문 일대 민족 이동을 유발하고 말았다. 제일 먼저 국경을 침입한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고 서진하여 서로마군을 격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다. 이리하여 410년 ‘영원의 도시’ 로마가 함락되고 잇따라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이 로마의 다른 영토를 유린하였다. 게르만 민족 이동의 결과, 서유럽에는 [[서고트 왕국]](에스파냐), [[동고트 왕국|동고트]]·[[롬바르드 왕국]](이탈리아), [[반달 왕국]](아프리카 북안), [[부르군트 왕국]](남프랑스), [[앵글로색슨 칠왕국|앵글로색슨 왕국]](영국) 등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동유럽에는 게르만보다 조금 늦게 슬라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동로마 제국 영토를 위협하였으나, 6세기 초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이를 막았다. 대제는 로마 제국의 재건을 꿈꾸어 한때 이탈리아는 물론 에스파냐, 북아프리카 등 옛 로마의 영토를 탈환하였고, 안으로는 로마법을 집대성, [[로마법 대전|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법전]]을 편찬하여 법제사상 큰 영향을 끼쳤다.그 후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다시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줄어들지만 14세기까지 계속된 제국은 줄곧 서유럽과 중동아시아를 잇는 사이에 자리하여 문화적으로 중개역을 담당하였으며,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적 전통을 융화, 계승하여 화려한 비잔틴 문화를 이룩하였다.
 
=== 중세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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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까지 서유럽 외의 세계는, 사산 왕조로 대표되는 이란 문명권과, 동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문명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7세기에 이슬람교가 성립되자, 종래의 여러 문명을 계승하면서도 이들의 문명권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이슬람 문명이다. 무하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에의 절대적 귀의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는데, 드디어 아라비아 전부족을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마호메트의 사후, 역대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했기 때문에, 불과 1세기 동안에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로부터, 서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사라센 제국이다. 정복사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제3대 오스만 시대 무렵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카를 대제가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됨으로써 그 막이 열렸다. 이에 카를 대제는 교황에 의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로마 제국 이래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비잔틴 세계나 이슬람 세계와 구별되는 이른바 중세 유럽 세계라는 정치, 문화적 공동체였다. 카를 대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켜 민족 이동기의 쇠퇴했던 문화를 부흥시키고, 게르만·로마·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융합시켜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래로 교역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어 온 지중해가 사라센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서유럽 세계에서는 교환경제 사회가 자연경제 사회로 후퇴하게 되었던 까닭에, 대제의 사후에는 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색슨계(系)의색슨계의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