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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대헌장(大憲章)’으로 번역된다. 존의 실정(失政)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과 대결,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원문에는 개조번호(個條番號)가 없으나 18세기 이래 63개조로 정리되어 있다. 새로운 요구를 내놓은 것은 없고 구래(舊來)의 관습적인 모든 권리를 확인한 문서로서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특권의 확인, 지방관리의 직권남용 방지, 사냥, 당면한 애로사항의 처리 등 여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1189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헨리 2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리처드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10년간을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외국에 있었고, 본국에는 단지 6개월 가량만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그의 동생인 존이 왕 역할을 하고 있었다(존은 헨리 2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1세의 동생이다).
 
본래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專制)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典據)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軍役代納金)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 ·감금할 수 없다고 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요구의 근거로서 크게 이용되어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었다.
10년 뒤인 [[1199년]],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이 정식으로 대관식으로 즉위했다.
[[프랑스]]의 [[프랑스의 필리프 2세|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아들인 아서 왕자(브르타뉴 공)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였고, 프랑스로 존 왕을 소환하였으나 존 왕은 거절하였다(이때는 영국 왕은 프랑스 국왕에 대해 신하 관계에 있었다).
 
이와 같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존 왕은 프랑스와 영토 전쟁을 명목으로 조세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교황과의 충돌로인해 [[파문]]을 당했다.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영주들과 대립 관계에 놓였고, 교회와도 맞섰으며, 귀족이나 도시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매긴 존 왕에게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은 당연했다.
 
결국 영국 내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 불리는 이 문서는 존 왕과 귀족들 간의 이러한 무력 충돌의 결과, 수세에 몰린 존 왕이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누리던 봉건적 권리와 지위를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봉신과 주군 간의 봉건적 관계에서 봉신이 지는 의무는 흔히 "조언과 원조(concilium et auxilium)"로 요약된다. 존 왕은 당시 프랑스에서 자신이 오래 수행해 온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봉신들의 이 의무를 악용하여 수탈을 거듭하였으며, 이것이 봉건 귀족들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이 문서 중, "어떠한 군역세 또는 봉건 원조도 우리 왕국의 공통된 조언(commune consilium)에 의하지 않고서는 징수하지 않는다"는 조항(제12조)은 특히 유명하다. 이 조항은 후일 일반적으로 징세에 대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게 된다. 또한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judicium parium suorum)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되거나, 재산이 박탈되거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지 않는다]"는 조항(제39조)은 후대의 법률가와 역사가들에 의하여 배심재판을 보장하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원래의 의미는 봉건 영주가 전통적으로 누리던 봉건법정을 열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카르타(Carta)"는 중세 영국 법제하에서 특정 집단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나, 구체적 양허사항을 담고 있는 문서를 말한다. 도시, 직업 집단, 대학교 등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libertates; liberties)를 규정한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마그나 카르타" 또한 이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인권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법제도의 변천과정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과거의 문서가 담고 있는 의미는 후세의 해석자들이 지배하게 되며, 마그나 카르타는 후대의 해석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로 각인되게 되었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