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Sernaryu(토론)의 편집을 210.90.120.131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Sernaryu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39번째 줄:
 
[[풍덕천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진면(水眞面)의 토월리 · 신리 · 정평리 일부를 통합 풍덕천리로 하여 수지면의 소재지로 삼았다. 『1872년지방지도』에 풍덕천장기(豊德川場基)라 하여 풍덕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확인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풍덕천의 천(川)자가 본래는 하천의 '내 천(川)'자를 한자화한 것이 아닌 '올래(來)'자였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풍덕래(豊德來)'가 되는데, 그 의미도 '풍덕에서 온다' 또는 '덕이 크신 분이 (풍덕에서) 온다'가 된다. 이러한 지명 해석은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유택 안치와 풍덕천이라는 지명을 관련시키는 것인데,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던 포은의 묘소를 면례하면서 용인현의 풍덕을 거쳐 현재 모현면 능원리의 문수산 아래 묘소를 자리 잡게 되는 과정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렇듯 풍덕래라고 불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풍덕천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72년지방지도』에 이미 풍덕천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속설로 전해진다. 오히려 '풍덕'이라는 명칭이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마을 하천이나 마을명으로 자리 잡았다. 『호구총수』에 보면 수진면에는 수상동(水上洞)과 수하동(水下洞), 즉 하천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등장하는데, 이때의 하천이 풍덕천으로 짐작되고 다른 일설에는 풍덕천의 깊이가 명주 한 필이 들어갈 정도로 깊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깊은 물에 많이 빠져죽어 '풍덩내'라고 하던 것이 풍덕천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ref>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편집부, 국토지리정보원(2008년)</ref>
 
==인구==
[[파일:수지구 연령별 인구구조.jpg|thumb|수지구 연령별 인구구조]]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