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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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egu thoroughfare.jpg|thumb|대구 중구 국채보상로 종각네거리.<br />도로 왼편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다.]]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으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제안하였다. [[1907년]] 2월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조선통감부]]의 방해와 [[어니스트 베델|베델]]이 모금액 중 2만원을 사적으로 투자했다가 원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운동은 소멸되고 만다.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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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복 논란 ===
그러나 [[한국통감부]]는 [[어니스트 베델|베델]]과 [[양기탁]]이 돈을 착복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한국통감부]]는 윤웅렬에게 "보상금 3만원 중 [[어니스트 베델|베델]]과 [[양기탁]]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청원서를 제출토록 사주하였다. 윤웅렬은 이 사주에 따라 국채보상금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ref name="ynjang26">장동학, 《한국경제 100년 과연 어떤일이?》 (무한, 2002) 26페이지</ref> [[어니스트 베델|베델]]이 모금한 금액 중 2만원을 이자를 조건으로 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이자는커녕 원금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자 의혹은 사실처럼 확산되었다.
 
[[1908년]] [[8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인 [[윤웅렬]]은 보상금 중 3만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했다 하여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어니스트 베델|베델]]은 이를 거부하였고, [[윤웅렬]]은 보상지원금 총합소장직을 사퇴한다. [[일본]]의 책동에 편승하여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는 [[어니스트 베델|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금을 횡령했고, 그 사실이 탄로났다고 기사화하였다.<ref name="ynjang26"/> [[윤웅렬]]은 [[어니스트 베델|베델]]에게 일부 맡긴 국채보상금 중 베델은 고리대금을 하였으나 일부 금액은 끝내 환수하지 못했고, 베델과 조선 국내 여론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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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제]]
* [[윤필오]]
* [[어니스트 베델|베델]]
* [[양기탁]]
* [[윤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