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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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로스는 375년경 [[이집트]]의 테오도시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삼촌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의 대결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테오필루스]]였다. 외삼촌 밑에서 [[수사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을 배웠으며, 덕분에 키릴로스는 [[성경]]을 거의 모두 암송할 정도였다. 외삼촌이 [[412년]]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곧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서품되었다.
 
키릴로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른 기독교 종파와 [[유대교]] 및 이교도들과의 투쟁에 나섰다. 특히 기독교의 분파인 [[노바티아누스파]]와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에 앞장섰다. 키릴로스는 과격한 방법으로 [[이단]]과 이교를 단죄했으며, 특히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히파티아]]의 죽음에 키릴로스가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히파티아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그는 유서깊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구가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새로 생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촌인 테오필루스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간의 대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점차 부상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양측의 긴장감은 [[428년]]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직에 오르자 점차 고조되어 결국 교리논쟁으로 번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