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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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 때 영조가 현경왕후에게 제각기 사가로 가라고 명하였으나, 효의왕후가 사가로 가지 않고 시어머님이 계신 곳에 있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영조가 그 말을 듣고 매우 착하게 여기어 같이 현경왕후의 사가로 나가라고 허락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때 효의왕후가 어린아이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차분하게 조신과 처사를 올바르게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영조의 환심을 산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1&moId=080&daId=070&gaLid=kwa_12108007_003&gaId=&yoId=&ilId=&leId=|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은 없고 순조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정조 승하 후 [[왕대비]]에 올랐다.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에대비에 봉해졌다. 정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수많은 존호가 올랐으나 검소하고 깨끗한 탓에 모두 거절하여 사후에 휘호로 예경자수를 받았고, 효심이 깊어 [[정순왕후 (영조)|정순왕후]] 등을 극진히 모셨다. 69세의 일기로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승하하였고 정조와 함께 합장한 [[융건릉|건릉]](健陵)에 능이 있다. 사후 시호는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였다가 고종때 장휘(莊徽)의 존호가 추시되었고, [[1898년]] [[대한제국]] 때 선황후(宣皇后)로 추존되었다.
 
== 《한중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