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번치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9번째 줄:
그런데 “[[번 (정치)|번]]”이라는 제도상의 호칭은 이때 처음으로 정한 것이고, [[에도 막부]]의 제도에는 “번”이란 호칭은 없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번”이라는 호칭은 1869년의 판적봉환부터 1871년의 폐번치현까지의 단 2년간의 제도이다.
 
당시, 번과 부·현(정부직할지)의 구역 분할 방식은 복잡했고, 그 부번현삼치제는 비효율적이었다. 폐번치현의 주 목적은 넨구(年貢, 세금)를 신정부가 거두어 국가재정의 안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구미열강에구미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 하였다.
 
그러나 폐번치현은 당시 일본 전체에서 200만 명이 넘었던 [[번사]](藩士)들을 대량 해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의 군대는 각번에서 파견된 군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각 번과 [[삿쵸]](薩長, [[사츠마 번]]과 [[조슈 번]]) 신정부 사이의 대립, 신정부 내에서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어떤 인물들 그리고 번은 번의 재정 사정 악화를 이유로 정부에 폐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이케다 요시노리]]({{lang|ja|池田 慶徳}}), [[도쿠가와 요시카츠]]({{lang|ja|徳川 慶勝}}), [[호소카와 모리히사]]({{lang|ja|細川 護久}}), [[난부 번]]({{lang|ja|南部藩}}) 등)
20번째 줄:
최초에는 번의 영토 분할을 따라 그대로 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현 [[도도부현]]보다 영토의 크기가 평균적으로 작았으며, 3부 302현으로 전 국토가 분할되었다. 11월에는 3부 72현으로 일부 현이 통합되었다.
 
그 후, 합병이 계속되어 현의 수는 69현([[1872년]]), 60현([[1873년]]), 59현([[1875년]]), 35현([[1876년]])으로 줄었다. 그러나 현의 면적이 너무 커져 행정력 문제와 같은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1889년]]에는 다시 일부 현이 분할되어 3부 43현으로 전체 행정구역의행정 구역의 수는 변화되었다.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