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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동오)|주연]] · [[반장 (동오)|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關平), 사마 [[조루 (촉한)|조루]]과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 (동오)|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 (공사)|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관중진]]이였던 것이다.<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0049991 『NOW』관우 67대손 찾았다], 동아일보, 2001-02-26.</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