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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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설화: 건국설화 출저있습니까.그리고 일본인이 살았다는 근거하고 여러가지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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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설화 ==
;건국 설화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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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야''' 건국 설화의 뜻의 자주색 줄은 탯줄을 의미하고 황금 알이 담긴 황금 상자는 엄마가 아기를 키우는 아기집을 뜻한다. 또 알과 상자가 모두 황금빛인 것은 철기 문화를 뜻하는 것이고 청동기 사회에서 금과 철기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커다란 힘이 되므로 6왕은 외부에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온 사람을 상징한다.
*[[42년]]에 200~300명의 무리가 [[구간 (신화)|구간]](9간)과 함께 [[구지봉]]에 모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의 목소리가 구지봉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자 사람들은 “네, 저희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자 “그럼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라고 했더니 “구지봉입니다” 라고 다시 말하자 “하늘이 나에게 너희들의 왕이 되라고 명하셔서 이렇게 왔노라 그러니 너희는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라고 하자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지가를 불렀더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오고 줄 끝에는 황금색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 알이 있었다. 그 상자를 귀하게 여겨 12일 동안 [[아도간]]의 집에 놔두었더니 12일 후에 사내아이로 바뀌고 10일이 다시 지나자 사내아이 중 키가 9자, 얼굴은 [[전한 고조]], 눈썹은 [[요 (군주)|요]] 임금, 눈동자는 [[순 (군주)|순]] 임금 같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 나타냈다는 뜻으로 [[수로왕]] 혹은 수릉 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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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연맹의 패망 ===
[[399년]]에 가야의 [[철기군]]은 신라의 주요항구인 울산으로 북상을 시작했고 여기서 상륙해 있던 일본군과 합류했다. 일본군을 그 지휘하에 넣은 가야군은 남천가에서 신라군의 주력을 격파한 뒤 곧바로 서라벌을 공격했고 신라는 국가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급히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남하해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요청을 했고 곧이어 가야와 마찬가지로 철기병이 주축인 5만명의 [[고구려]]군이 서라벌을 기습공격했다. 서라벌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고구려군에 궤멸당해 와해되고 말았고 가야군도 1만 5천 안팎의 자국병력은 유지한 채 [[동래군|종발성]]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고구려와 가야의 철기군은 대등한 능력을 지녔지만 숫적으로 불리했던 가야군은 결국 고구려에 패퇴하고 말았고 이 전쟁으로 가야는 패망하고 말았다. 가야가 패망한 뒤 변한지역은 [[반파국]]의 대가야가 등장하기까지 한동안 미증유의 혼란에 휩싸여야 했다. 가락국으로부터 대규모 난민이 발생되어 [[반파국]]등의 변한 내륙으로 이주하거나 일본열도로의 [[보트피플]]이 유입되어 경남내륙과 일본 큐슈일대에 가야계소국의 건국이 이루어지거나 반파국이 [[대가야]]로 도약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ref>이시기의 가야계 보트피플의 유입이 일본 고대 천황제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ref> 한편 가야가 패망해 맹주지위를 상실한 가락국은 낙동강 수로와 [[고 김해만]]의 배후였던 부산지역을 상실했고 이는 결국 가락국의가락국이 숨통을멸망하게 막고되는 말았다원인이 됬다. 해상무역이 적잖이 중요했던 가락국으로서는 무역로가 끊겨서는끊겨서 먹고영향력이 살 길이 막막했기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가락국은 가야의 일각에서 겨우 명줄만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 가락국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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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가락국, 소위 금관가야는 김해와 부산 일대에 많은 수의 고분군과 그에 부장된 유물을 남기고 있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광개토왕의 남정 전까지 활발한 고분조성이 이루어졌으나 그 이후 그 조성이 중단되어 가락국의 패망을 시사해주고 있다. 라는 서술은 잘못된 것으로 복천동의 최상위층 고분인 10, 11호와 21, 22호, 39호, 53호 등은 모두 고구려왕 남정이 이루어진 400년의 뒤인 5세기 1/4분기 이후에 조영된 고분이며 이후 동아대 1호가 조영되는 6세기까지도 복천동에서는 계속해서 대형의 고분들이 조영된다. 신라와 함께 가야의 장례풍습중에 주요특징은 다량의 유물을 껴묻는 후장(厚葬)이다. 이로 인해 다양한 토기와 유물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특징은 [[독무덤]]과 함께 [[덧널무덤]]에 있는데 이와 함께 도질토기(陶質土器), 그리고 순장의 풍습등은 북방문화의 영향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금속유물은 다수의 철정(鐵鋌)과 함께 철제 갑옷과 금동관이 파편으로나마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철이 주종을 이루고 금, 은 등의 귀금속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에 많은 량의 옥(玉)제품이 출토되었다. 귀금속이 발견된 것은 5세기 이후의 일이다. 토기 중에는 가야계 토기 외에도 특이하게도 일본식 토기인 [[하지키]]도 발견되어 고대 일본인들이 실제로 가락국에 일부 터를 잡고 살았을 정도로 일본과의 빈번한 교류를 시사하기도 한다.
 
== 역대 국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