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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포에니 전쟁]]에 의해서 최초의 해외령인 [[시칠리아 섬]]을 얻음으로써 로마의 국정이 크게 변화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몇 번이나 위기에 직면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고 난 뒤부터는 본격적인 지중해 진출이 시작된다.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그리스를 보호함으로써 동지중해를 석권했지만 로마의 내부에는 위험한 조건이 쌓이고 있었다. 하나는 전쟁 노예의 유입(流入)과 토지 겸병(兼倂)에 의한 대농장 경영이 진전하여, 로마를 뒷받침하여 왔던 중장보병인 자유농민이 격감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싸고 지배층 사이에서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사회 문제에는 유효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내란을 유발하였다.
 
=== 파르티아 ===
유목민(遊牧民)이었던 파르티아인은 세력이 늘어나 이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예술, 종교 등의 면에서 이란적인 특색이 짙어졌다. 이와 같은 혼합적 성격이 파르티아 문화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또한 파르티아 시대는 훗날의 사산조 시대에 이란 문화가 개화(開花)하기까지의 서아시아에서의 과도적(過渡的)인 한 시기로 볼 수 있다.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 세력의 후퇴와 함께, 동방 변경에서는 먼저 박트리아의 디오도토스가 분리하였고, 이어 기원전 247년 이란계 유목민 출신의 아르사케스가 독립하여 파르티아 지방을 지배했다. 이것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왕국(전 247 후 226)의 출발이다. 그는 얼마 후에 전사하고, 아우인 티리다테스가 뒤를 이어 서방에 영토를 확장하여 도읍을 헤가톰필로스에 두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 1세(재위 전 171 전 138?) 시대에 파르티아의 대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는 동으로는 박트리아 왕국, 서로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쳐서 헤라트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 티그리스강 동쪽 연안에 파르티아 후기의 수도 크테시폰을 건설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동방에서는 박트리아 왕국이 멸망하여 대월지(大月氏)로 바뀌었고, 서방에서는 로마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파르티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2세(재위 전 123 전 87?)가 즉위하여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에까지 세력을 뻗쳐서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그가 죽은 후 국내에 분쟁이 빈발하게 되고, 또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로마와의 대립으로 고투를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의 카를라에 전쟁에서는 크라수스를 전사하게 하였으며 기원전 36년에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대패(大敗)시켰다. 로마의 제정(帝政)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화평을 희망하여 이후 약 1세기 동안은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가 비교적 평온했다.
 
===인도===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에 걸쳐 [[갠지스 강|갠지스강]] 유역은 샤이슈나가 왕조가 지배하는 [[마가다|마가다국]]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그 후 기원전 4세기 초에 샤이슈나가 왕조가 무너지고 난다 왕조로 바뀌었으나 마가다국의 번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한편 인더스강 유역은 기원전 518년경 [[아케메네스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에 정복되어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전해진 페르시아 문화는 다시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에서 번영하고 있던 인도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7년부터 기원전 325년에 걸쳐서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하여 그 후 얼마 동안 이 지방은 그리스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갠지스, 인더스의 두 강에 걸친 통일제국을 건설한 것은 [[마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이다. 그는 마가다국의 지배권을 난다 왕조로부터 빼앗자 즉시 서북 인도의 그리스 세력을 일소하고, 이어 남부 데칸 지방의 정복에 힘을 기울였다. 마우리아 왕조는 제3대 [[아소카]] 왕 시대에 최성기를 맞아서 그 지배는 인도 대륙의 거의 전역에 미쳤다. 마우리아 제국은 중앙 직할령과 속주로 나뉘었고 각 주에는 중앙에서 왕자나 대신이 파견되어 통치를 담당하였다. 통일제국의 출현에 의해서 국내 교통이 원활해졌고, 경제·사회·문화의 각 방면에 있어서 전국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화적 후진 지대였던 남부 인도는 이 시대에 북쪽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문화 발달이 촉진되어, 마우리아 제국 쇠퇴 후에 있어서의 안드라 왕조의 번영을 보게 되었다.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이 왕조도 아소카의 죽음 후 쇠퇴의 길로 향하여, 기원전 187년경 슝가 왕조의 창시자인 푸샤미트라에 의해서 무너지고 인도는 다시 정치적 분열의 시대로 들어갔다.
 
===중국===
 
==== 진의 중국 통일 ====
기원전 238년 진왕(秦王)은 즉위 후 10년 만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정치에 임하게 되었다. 진(秦)은 이미 효공(孝公) 이래의 부국강병책이 열매를 맺어, 전국(戰國)의 열강 7개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다. 이 충실한 국력을 배경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동방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적대하는 6국의 정복에 나섰다. 진은 강대한 군대와 교묘한 외교술(外交術)이나, 밀정에 의한 열국의 이간공작(離間工作) 등에 의해서 우선 기원전 230년에는 정면(正面)의 적인 동시에 중원(中原)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韓)을 멸망시켜서 동방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어서 북으로 진격하여 조(趙), 연(燕)을 정복하고, 또한 동쪽의 위(魏), 남쪽의 초(楚)를 넘어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강국 제(齊)를 기원전 221년에 멸망시켜 천하통일의 위업을 완성했다.
 
진왕은 이사(李斯)를 발탁하고 통일국가의 기초를 굳게 다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단행했다. 이사는 법가사상을 신봉하는 정치가였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법가의 정치는 상앙 이래의 진 나라의 전통이요, 이것은 또한 통일국가의 완성에 의해서 타고난 자신(自信)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천하를 지배하려고 한 진왕의 심정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왕이 이사를 발탁한 것은 신생의 통일국가 통치의 기본방침을 명확히 내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왕(秦王)은 왕의 칭호를 폐지, 황제(皇帝)라 자칭하고, 황제 전용어를 만들어서 군주의 권위를 높였다. 이 제(帝)라는 말은 본래는 하늘의 신으로서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신(最高神)을 의미하고 있었다. 또한 황(皇)은 ‘빛나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지상의 왕인 진왕이 왕의 칭호를 고쳐서 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은 세계는 물론이요 전우주를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강한 자부의 표명이요, 또한 군주(君主)라는 사람의 성격의 표명이었다. 진왕은 또한 지배자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군주의 사후에 업적에 비추어 호(號)가 추증되는 시(諡)의 제도를 폐지하고, 초대(初代)는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고, 이하 2세도 황제(皇帝), 3세도 황제라 하여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영원히 전해 내려갈 것임을 선언했다. 이리하여 진왕은 초대의 황제가 되고, 사후에 시황제라고 일컫게 되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으로서 종래와 같이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봉지(封地)를 내주어 자치(自治)를 인정하는, 이른바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이것을 지방 행정의 단위로 삼았다. 진(秦)에서는 상앙 이래 현제(縣制)를 시행하고, 또한 새로운 정복지에는 군(郡)을 두어 직할지로 삼고 있었지만, 전국 규모로 획일적 군현제가 시행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와 동시에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우선 중앙에는 행정, 군사, 감찰의 최고 책임자로서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두고, 그 밑에는 사법(司法)의 정위(廷尉), 국가 재정을 맡는 치속내사(治粟內史), 제실(帝室)의 재정을 맡는 소부(少府), 궁전 경비를 맡는 낭중령(郎中令), 궁문 경비를 맡는 위위(衛尉), 외교를 맡는 전객(典客), 종실관계의 종백(宗伯), 종묘(宗廟)의 태상(太常), 거마(車馬)를 맡는 태복(太僕) 등의 9관(九官)을 배치하여 서무(庶務)를 통할했다.
 
한편, 지방의 군(郡)에서도 중앙을 본따 장관(長官)에는 수(守),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 감찰관으로는 감(監), 현에는 장관으로서 영(令), 부(副)에는 승(丞), 군사에는 위(尉)가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어 통치에 임했다. 이리하여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정연한 행정조직을 만들어, 황제의 명령이 그대로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이 진 나라의 행정조직은 다음의 한(漢)나라에 계승되어 나중에는 많은 변화가 가해졌지만, 중국에 있어서의 통치의 기본적인 조직으로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랫동안 천하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戰國)의 각국에서는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고, 저마다 독자적인 문자나 계량의 단위, 화폐 등이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운영의 필요성에 의한 군현제의 전국 실시에 따라 각종의 통일이 시행되었다. 문자(文字)는 이사(李斯)가 고안했다고 하는 소전(小篆)으로 통일되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정하게 정하며, 화폐는 포전(布錢)이나 도전(刀錢) 등을 폐지하고 진(秦)의 원형방공(圓形方孔)의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했다.
 
또한 도로망(道路網)의 전국적인 정비를 시행하여 마차의 수레바퀴의 폭까지 동일규격으로 고쳤다. 역시 이 도로망은 치도(馳道)라고 불리면서 시황제의 순행용(巡幸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방과의 연락용 외에 비상시에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키는 군용 도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사상의 통제도 엄격하여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자(儒者)를 생매장하였고, 정치에 유해하다고 인정된 서적을 불태워버렸다. 이것이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대외적으로는 북쪽의 흉노를 치고 춘추 이래의 만리장성을 보수하여 북변의 방비를 강화하고 남쪽은 화남(華南)에서부터 지금의 베트남 북부까지를 영유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빈번한 원정과 장성(長城), 궁전, 능의 수축 등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을 괴롭혔으며, 또한 개혁도 급격했기 때문에 백성의 불만은 차츰 높아졌다. 기원전 210년 순행(巡幸) 도중 황제가 급사하자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亂)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진나라는 통일 후 불과 15년에 멸망했다.
 
==== 한 성립 ====
진(秦)나라의 급격한 통일 정책이나 일반 농민의 과중한 요역(?役)은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각지에 반란을 유발시켜 드디어 기원전 206년 옛 6국 중의 초나라 귀족인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타도했다. 이후 항우와 그의 협력자였던 유방(劉邦)과의 5년간에 걸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항우는 진에 의해서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즉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침(?)에 옮긴 후에 이를 죽인 후, 자신은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일컫고, 팽성(彭珹)에 도읍을 장하여 쟝쑤(江蘇), 안후이(安徽) 등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의 정도에 의거하여 각지에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다.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그해 8월, 유방은 관중(關中)을 공격하러 나섰다. 순식간에 관중 일대를 정복하여 역양(?陽)에 도읍을 정한 유방은 이듬해 3월에는 의제(義弟)의 복수를 주장하고 반초(反楚) 세력을 결집하여 항우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후 약 2년여에 걸쳐 항우와 유방은 잉양(滎陽) 부근을 끼고서 동서에 대치하여 격투를 계속했다. 그동안, 유방은 싸움이라는 싸움에서는 모두 다 항우에게 패했으나, 진평(陳平) 등의 반간계략(反間計略)을 써서 교묘하게 항우의 여러 장수들을 이반시키는 한편, 한신(韓信)을 제왕(帝王)에 봉하여 배후에서 항우를 겨누게 했다. 또한 팽월(彭越)에게 명하여 초나라의 양도(糧道)를 끊게 하는 등, 서서히 항우를 괴롭혔다.
 
기원전 203년 8월에 일단 화의(和議)가 성립됐으나, 유방은 이를 어기고 항우를 추격하여, 그해 12월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자살하고, 초·한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유방(한나라의 高祖)은 중류 농민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옛 귀족들을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있어서의 사회의 대변동을 예측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유방은 기본적으로는 진나라의 지배제도를 계승했으나 봉건과 군현 두 제도의 병용(郡國制) 등 교묘한 정책에 의해서 한제국의 기초를 굳혔다.
 
한 고조 사후 황태후 여씨(呂氏) 일족의 전횡(專橫)에 따른 일시적인 위기는 있었으나 경제(景帝) 때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반란을 진압하고 무제(武帝)의 치세가 되자 한나라는 극성기(極盛期)를 맞았다.무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외정(外政)에도 적극책을 써서 영역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빈번한 정벌은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러한 그의 치정(治政)도 만년에는 파탄의 빛이 짙어졌다. 다음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는 무제 말년의 실정을 만회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올릴 수가 있었으나 한편 이즈음부터 대토지 소유자로서 호족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차츰 황제의 권력에 의한 통일적 행정을 문란케 했다. 여기에다 원제(元帝) 이후 궁정 내에서는 외척(外戚)인 왕씨(王氏)가 세력을 휘두르게 되어 기원후 8년 드디어 전한(前漢)은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 1세기-3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