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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
[[왕망]](王莽) 말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한실(漢室)의 혈통을 이은 남양(南陽:허난성 남부)의 호족 유수(劉秀)는, 남양과 하북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적미(赤眉) 등의 농민 반란군이나 다른 호족군을 진압하고 25년 뤄양에[[뤄양 시|뤄양]]에 도읍을 정하여 제위에 올라, [[후한 광무제|광무제]](光武帝), 한제국(漢帝國)의 부활을 선언했다. 이로써 후한제국이 성립된 것이다. 광무제는 전한의 여러 제도를 규범으로 하여 내정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정국의 안정을 회복했다. 남(南)흉노를 예속시키고, 동북의 오환(烏桓)·선비(鮮卑)에 대한 방위를 굳히고, 남쪽의 여러 민족을 평정하였으며, 서쪽의 강(羌)족을 쳤다.후한은 4대 화제(和帝) 때까지는 국력이 충실하여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을 복종시켜서 동서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2세기에 들어서 유약(幼弱)한 황제가 계속된 것이 원인이 되어 조정에서의 환관(宦官)·외척(外戚)의 힘이 강해졌고, 특히 유가적 교양을 갖춘 청류기절(淸流氣節)의 학자들이 이에 대항하는 등, 국가 중추부에 있어서의 통일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국가는 일반 농민들의 생활과 생산 활동을 보장하는 기능을 잃어갔다. 또한 각지의 호적들은 전한(前漢)에 비해 더욱 토지 겸병(兼倂)을 심하게 하여 일반 농민을 압박했다.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 농민들 사이에는 [[태평도]](太平道), [[오두미도]](五斗米道) 등의 주술적(呪術的) 민간신앙이 침투하여 마침내 184년에는 이들 종교에 의해서 단결한 농민들에 의한 황건(黃巾)의[[황건의 난이난]]이 일어났다.이 주류 세력은 그해 안에 평정되었지만, 이후 각지의 지방관리·호족들은 제각기 무장 자립하여, 후한제국은 와해의 징조를 더해 갔다. 이러한 때에 황건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조조]](曹操)는, 한실을 옹호하여 화북을 누르고 위왕(魏王)에 봉해져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에 헌제(獻帝)를 위협하여 선양(禪讓)을 받았고, 이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위(魏)·오(吳)·촉(蜀)이 정립(鼎立)하는 3국시대로[[삼국 시대 (중국)|3국시대]]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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