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차차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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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
[[6년]](즉위 3년) [[음력 1월]]에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묘(廟)를 세웠고, [[8년]](즉위 5년)에 [[석탈해]]를 맏사위로 받아들였고, [[10년]](즉위 7년)에는 그를 [[대보 (관직)|대보]](大輔)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다. [[4년]](즉위 원년)에 [[낙랑]]의 군사가 와서 [[경주시|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남해 차차웅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14년]](즉위 11년)에 [[왜]]가 민가를 노략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는 사이 낙랑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 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 해 물러났다.
 
[[18년]], [[경주]]에 가뭄이 들었다. 음력 7월에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고구려에 복종하는 일곱 나라가 와서 투항하였다.(월 미상) [[19년]](즉위 16년)에 북명(北溟)에서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 차차웅에게 바쳤다. 《[[삼국지]]》〈[[:s:삼국지 (진수)/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條)에 "그 나라 인장에는 '예왕지인'이라 한 글귀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예 (민족)|예]]나 [[부여]]가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이름이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비추어 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ref> [[신채호]]저, 《[[조선상고사]]》<[[:s:조선상고사/제4편/제4장|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 '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待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ref>
 
[[24년]](즉위 21년)에 죽어 [[경주]] 사릉원(蛇陵園) 안에서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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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차남 : [[박나로]](朴奈老)
**** 장녀 : [[아효부인]](阿孝夫人), 제4대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의 왕후<ref name="선원">[http://parkssi-munhwa.com/seonwondo/seonwondo01.htm 신라박씨 선원세계도(新羅朴氏璿源世界圖)<!-- 봇이 붙인 제목 -->] </ref>
**** 삼남 : [[박환 (신라)|박환]](朴桓)
***** 손자 : [[박지인]](朴智仁, [[각간]] 역임)<ref name="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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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름 = 후 대
}}
{{신라의 역대 국왕}}
 
[[분류:기원전 50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