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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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년(재위 원년), 당의 [[측천무후]]로부터,<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에 책봉됐으며 휘를 피하기 위해 좌-우이방부(理方府, 입법을 관할)를 좌-우의방부(議方府)로 개칭했다. 694년(재위 3년)에 문무왕의 동생인 대각간 김인문(金仁門)이 당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695년(재위 4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해 각각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관할케 했다. [[698년]](재위 7년) [[3월]]에는 일본으로부터 온 사자를 숭례전에서 접견했다. [[699년]](재위 8년) [[2월]]에 당에 조공했다. [[700년]](재위 9년) 5월,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중시 [[김순원 (신라)|김순원]](金順元)이 이에 연루돼 파직당했다.
 
재위 11년 [[702년]] [[8월 24일]]([[7월 27일]])에 10대의 나이에(16세)사망해, 시호는 효소왕으로 정하고, [[망덕사]](경 혅시 배반동)의 동쪽에 매장됐다. 그 왕릉은 현재의 경주시 조양동의 사적 184호에 비정 되고 있다. 효소왕이 죽자, 당의 측천무후가 죽은 효소왕을 위해 정무를 2일간 맡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효소왕" />
 
== 전해오는 이야기 ==
[[신라시대]] [[신문왕]] 때(682년) 어느날 동해바다에서 [[감은사]] 앞으로 섬이 떠내려오면서 두 개로 갈라졌다 합했다 했다. 왕이 그 섬에 올라 용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용은 신문왕에게 흑옥대를 바치고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국가의 안녕을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만파식적 피리를 만들었다.
 
당시 문무왕릉에서 동북쪽으로 10km10&nbsp;km 떨어진 곳에 소용돌이치는 소가 있고 여기 큰 바위섬이 있다가 지금은 가라앉았다고 하는 그곳 감포 앞바다에는 원래 섬이 12개 있었다고 한다. 그 많은 섬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고 대왕암이라는 바위만 남아 있다.
 
[[신문왕]] 일행은 [[기림사]] 뒤 함월산으로 해서 월성으로 돌아간다. 이때 왕의 수레는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 대궐에 있던 태자 이공(후일의 효소왕)이 옥대와 만파식적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신문왕을 맞으러 서라벌에서 말을 달려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용의 비늘로 된 옥대의 띠판을 하나 끌러 물에 담갔다. 그랬더니 띠판에 새겨진 용이 살아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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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분류:신라의 왕|효소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