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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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초기 역사 ===
[[16세기]]에 [[유럽]]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북미 대륙의 동부에서 남동쪽 걸쳐 [[미시시피 강]] 유역에 살고 있었다. 18세기 체로키 족은 [[영국]]과 [[미국]] 사이에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전투의 연속이었다 ([[치카모가 전쟁]]). [[1794년]] 미국 사이에 휴전 조약을 맺은 후, 문명화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치카소 족]], [[크릭 족|무스코지 부족]] 연합, [[촉토 족]], [[세미놀 족]]과 5대 부족 연합을 결성하고,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이받아들여 서양[[교육]]제도, [[관공서]], 공장같은 백인 사회 구조 등을 도입하는 등 "[[문명화된 다섯 부족]]"이라고 불렸다.체로키 원주민 공동체의 서구화는 미국 원주민들은 미개해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서양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렸다.<ref>《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오준호 지음/개마고원 92쪽</ref>
 
=== 눈물의 길 이전 ===
[[1821년]]에는 [[세쿼야]]에 의해 [[체로키 문자]]가 발명되었다. 85음절로 구성된 사용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문자로 빨리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그들은 백인의 생활 양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주변 백인과 혼혈도 진행하게 되었다.
[[1830년대]]에 [[조지아 주]]에서 일어난 [[골드 러시]]로 인해 백인이 그들의 토지에 난입해 왔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들은대통령은 그들을 서쪽 원주민 영토에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무력으로 이것을 요구했다. 체로키 족들은 이에 대항하여 저항 전쟁을 벌였고, "[[세미놀 전쟁]]" 등의 인디언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 눈물의 길 이후 ===
[[1838년]] 미국 육군의 군사력에 굴복을 강요 당했던 체로키 족을 비롯한 6만명의 "5대 부족"은 [[미시시피 강]] 서쪽의 원주민 영토(현 [[오클라호마 주]])로 이주를 강요당했다. 이 강제 [[인디언 이주|원주민 이주]]는 도보로 진행되어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렸다. 당시의 기록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의 노파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걷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이 가혹한 강제 이주는 체로키 족뿐만 8천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사회학]]자 오준호에 따르면 체로키 원주민 공동체는 [[면화]]를 심기위한 [[미국]]정부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한겨울에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천구백킬로미터나 떨어진 [[인디언 보호구역]]에 강제이주되었다. 헐벗고 굶주린 체로키 원주민들은 무려 4천명이나 [[저체온증]]이나,[[영양실조]]로 죽임을 당했다. 보호구역에 갇힌 체로키원주민들은 약간의 보조금을 받으며 기념품 장사를 하여 겨우 살았다. 당연히 미국 원주민들은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지거나, 세상을 바꾸려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많은 [[미국 원주민]]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았다.<ref>《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오준호 지음/개마고원 91쪽</ref>
[[노스 캐롤라이나 주]]를 비롯해 동부에서, 남동쪽 체로키 족의 일부는 백인의 도움으로 산 깊은 곳에서 숨어 강제 이주를 피해 현재 “동부 체로키 족”(인구 약 1만명)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시조가 되었다. 체로키 족이 사라진 조지아 등 남부의 광대한 토지는 나중에 면화 산지로 변신하게 된다. 이렇게, 체로키 족은 크게 서부와 동부로 분단되게 되었다. [[1971년]]에 히트했던 곡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ref>by Paul Revere and the Raiders</ref> 은 그러한 나라와 언어를 강탈 당했던 체로키 등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잘 표현한 노래이다.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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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erokeeOTSA.PNG|thumb|300px|오늘 날의 체로키 국가 사법 지역(짙은 청색)]]
그러나, [[2011년]]에 체로키 부족회의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아프리카계]] 부족민들에 대한 체로키 시민권을 박탈할 것을 결의하여 물의를 빚었다.<ref name="Trimble">[http://indiancountrytodaymedianetwork.com/ict_sbc/the-cherokee-dred-scott-decision/ Chuck Trimble, "The Cherokee Dred Scott Decision"], ''Indian Country Today'', 18 September 2011, accessed 20 September 2011</ref> 체로키족 내의 아프리카계 부족민들은 [[남북전쟁]] 전까지 체로키족이 부리던 노예들의 후손인데, 남북전쟁이 끝나고 이들이 대거 해방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체로키족들의 차별이 극심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삶이 바뀌다===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 빈곤을 겪던 체로키족들은 1990년대부터 일정소득을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준비했다. 1997년 11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에 대형카지노가 개장하였다. 객실에 1천개,스위트룸이 1백개나 되는 호텔, 밥집, 상점, 수영장, 피트니스 센터가 개장하는 등 관광사업을 하였는데,10년간 체로키족이 주 정부를 설득한 결과이다. 주지사와 원로들은 도덕적 해이를 걱정하여 관광사업에 반대했으나,카지노 단지는 체로키 공동체에 큰 도움이 되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카지노 단지의 수익이 3배 가까이 늘어나자 학교, 병원, 소방서등의 공공기관을 세웠고, 8천여명의 체로키 원주민들에게 배당금을 나누는 기본소득을 실시했다.그 결과 빈곤선 이하의 저소득층<ref>[[유럽연합]]에서는 [[빈곤]]기준선을 [[평균임금]]의 50%이하로 정하고 있으며,[[OECD]]에서는 [[중위소득]](소득수준의 가운데에 속하는 소득)의 3분의 2 미만을 저임금으로 보고 있다.</ref>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정신건강,학력이 높아지고, 범죄률이 낮아졌다.<ref>《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오준호 지음/개마고원 91-92쪽</ref>
== 사용 언어 ==
{{참고|체로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