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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llang|ru|Ксен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Романова}}, [[1875년]] [[4월 6일]] - [[1960년]] [[4월 20일]])는 [[제정 러시아]]의 황족으로,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장녀이자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이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와 결혼하여 6남대공비가 1녀를 두었다되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암살한 핵심 인물로 유명한 [[펠릭스 유스포프|펠릭스 유수포프 공]]은 크세니아 여대공의 사위이다. 크세니아 여대공은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를 탈출, 이모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왕비가 통치하는 [[영국]]에 정착한 뒤 사망하였다.
 
== 생애 ==
=== 유년기와 결혼 ===
[[1875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아니치코프 궁]]에서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와 그의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1847년)|마리야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1881년]] 6세 때 할아버지이자 차르인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자 아버지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로 즉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3세는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크세니아 여대공을 포함한 자녀들을 황실의 본궁인 [[겨울 궁전]]에서 교외의 [[가치나 궁]]으로 이주시켜 자라나도록 조치하였다. 가치나 궁에서 크세니아 여대공은 가정 교사의 휘하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를 비롯한 언어와 그림, 운동, 춤, 피아노 등의 기예를 익히며 성장하였다.
 
[[1894년]] [[8월 6일]] [[여름 궁전]]에서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애칭은 '산드로Sandro')와 결혼하였다. [[1890년]] 처음 크세니아 여대공과 알렉산드르 대공이 결혼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알렉산드르 3세]]는 딸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과 알렉산드르 대공의 거친 매너와 무례함 등을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망설였으나, 결국 허락하였다. 크세니아 여대공의 결혼식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알렉산드르 3세]]는 같은 해 [[11월 1일]]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두 사람은 결혼 다음 해인 [[1895년]] 장녀 이리나 공녀를 얻은 것을 시작으로 6남 1녀를 두었다.
=== 러시아 혁명 ===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1847년)|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함께 남편 알렉산드르 대공의 [[크림 반도]]의 영지에 머물렀다. [[1918년]], [[시베리아]]로 추방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영국의 대비였던 이모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사촌인 [[조지 5세]]의 배려에 의해 HMS 말버러 함을 타고 러시아를 탈출해 영국에 도달하였다. 이후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1847년)|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는 막내딸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함께 영국을 떠나 친정인 [[덴마크]]에 정착했으나, 크세니아 여대공은 영국에 남았다.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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