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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19세기까지 ===
[[19세기]]에 [[석탄]]의 존재가 확인되었고,확인됐고 [[1890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의 소유가 되었다. 석탄석탄을 채굴을 위해채굴하려고 주위를 매립하였고매립했고 [[다이쇼 시대]] 이후는 철근 콘크리트조의콘크리트조 주택이 건설되었다건설됐다. 해상에서 본 실루엣이 마치 [[일본 제국|대일본제국]] 해군의 전함을 닮아 군칸지마로 불려왔다불려 왔다.
 
=== 20세기 ===
1916년에는 일본에서[[일본 제국|대일본제국]]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집합 '30호동'이주택 30호 동이 건설되었다건설됐다. 5년 후인 1921년에 [[나가사키 신문]]도 당시 미쓰비시미쓰비시중공업 중공업나가사키조선소에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건조 건설중이었던중이었던 [[일본제국 해군|일본대일본제국 해군]]의 [[전함]]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군칸지마라고 불렀기 때문에,불렀기에 군칸지마라는 통칭은 [[다이쇼 시대]] 무렵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듯하나 이 무렵에는 아직 철근 콘크리트조의콘크리트조 고층 아파트는 적었고, 대부분은 목조 단층집이나 2층집이었다이층집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군간지마는,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對日항쟁期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等지원위원회의 「사망 기록을 통해 본 端島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 조사」(2012)를 보면, 추정하건대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조선인 연인원 약 500명에서 800명이 이곳에 징용되어 노역에 동원됐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 수가 부족하자 [[일본 제국|대일본제국]] 행정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1938년 4월에 [[일본 제국|대일본제국]]이 사람에 관한 자원과 물질에 관련된 자원을 총동원하려고 제정해 공포한 전시 경제 통제의 기본법인 「국가총동원법」을 이용해 조선인들을 징용했다. '지옥섬’ 혹은 ‘감옥섬’이라 불린 군칸지마는 가스 폭발 사고에 노출됐고 노역하는 장소가 비좁아 노역하는 사람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듯이 노역 환경이 열악한 해저 탄광에 징용된 조선인들은 하루 12시간씩 채굴 노역에 동원됐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채굴 조건 탓에 병에 탄광 사고나 영양실조나 병에 걸려 죽었고 도망하려고 하다가 바다에 빠져 비참하게 죽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후 1940년 부터 1945년 까지 조선인 약 800명이 강제동원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수가 부족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에 실시된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 인구가 전성기를 맞았던 1960년에는 5,267명이 하시마 섬에 거주하여, 인구 밀도는 제곱 킬로미터 당 83,600명으로 [[도쿄 23구]]의 9배 이상에 달했다. 탄광 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화장장, 장지, 충분한 넓이와 시설이 있는 공원은 섬 안에 없어서, 하시마 섬과 다카시마 사이에 있는 나카노시마에 건설되었다.
 
태평양 전쟁이후 1940년 부터 1945년 까지 조선인 약 800명이 강제동원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수가 부족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에 실시된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 인구가 전성기를 맞았던 1960년에는 5,267명이 하시마 섬에하시마에 거주하여, 인구 밀도는 제곱 킬로미터 당킬로미터당 83,600명으로 [[도쿄 23구]]의 9배 이상에 달했다. 탄광 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구비했으나 화장장, 장지, 충분한 넓이와 시설이 있는 공원은 하시마 안에 없어서, 하시마 섬과하시마와 다카시마 사이에 있는 나카노시마에 건설되었다.
1960년 이후에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어감에 따라 쇠퇴해갔다. 1965년에 미츠세 구역의 신광이 개발되어 일시기 회복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의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 폐산하였다. 폐산시에는 약 2,000명까지 줄었던 주민은 4월 20일까지 모두 섬을 떠나, 하시마 섬은 [[무인도]]가 되었다. 다카시마 광업소의 잔무정리 등 탄광 관련 시설의 해체 작업은 1974년 말까지 이어졌다.
 
1960년 이후에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어감에 따라 쇠퇴해갔다쇠퇴해 갔다. 1965년에 미츠세 구역의 신광이 개발되어개발돼 일시기일시 회복되었지만회복돼는 듯했지만, 1970년대 이후의이후 에너지 정책의정책에 영향을 받아영향받아 1974년 1월 15일 폐산하였다폐산했다. 폐산시에는폐산 시에는 약 2,000명까지 줄었던 주민은 4월 20일까지 모두 섬을 떠나, 하시마 섬은하시마는 [[무인도]]가 되었다. 다카시마 광업소의 잔무정리잔무 정리를 위시한 탄광 관련 시설의시설을 해체해체하는 작업은 1974년 말까지 이어졌다.
 
=== 현황 ===
근대화 유산으로서, 그리고 [[다이쇼 시대]]로부터에서 [[쇼와 시대]]까지 이르는집합 집합주택의주택의 잔존물로서도 주목받고 있다주목받는다. 폐허 붐의 일환으로서도 여러 차례수차례 화제에 오른다. 현재는 무인화에 따라 건물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다진행된다. 외벽의 붕괴 개소에개소를 대해서는대상으로 해서는 일부 [[콘크리트]]로 수복이 진행되고 있다진행된다.
 
섬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지만소유했지만, 2001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13년)에13년에 [[다카시마 정]]에 무상으로 양도되어양도돼 현재는 나가사키 시의 소유지가 되었다. 건물의 노후화,노후화와 폐허화에 따라 위험한 곳이 많아,많아서 섬 안으로의 출입은 오랫동안 금지되었다. 2005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17년) 8월 23일, 보도 관계자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허가돼 황폐화가 진행되는 도내섬 안 각소의 모습이 각 매체에 소개되었다. 도내의섬 안의 건축물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곳이 많지만 어느 정도는 한전면에서의 문제가 해결되어,해결돼 2008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20년) 나가사키 시에서 '나가사키 시 하시마 견학 시설 조례'와 '하시마에의 출입의 제한에 관한 조례'가 성립되었다성립됐다. 이로써 섬의 남부에 정비된 견학 통로에 한해, 2009년(, 일본 연호려는 헤세이 21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상륙과 견학이 가능해졌다. 이후 1개월간 4,601여 명, 1년간 59,000여 명이 상륙했다.
 
일부에서 [[세계유산]] 등록 운동이 진행되어,진행돼 2006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18년) 8월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하시마 섬을하시마를 포함한 메이지 시대의 산업 시설을 지역 관광 자원으로 사용하기사용하려고 위해 세계 유산세계유산 등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20년) 9월 '큐슈, 야마구치의 근대화 산업 유산군'의 일부로서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추가 기재가 확정되었고,확정됐고 2009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21년) 1월 기재되었으며,기재됐으며 2015년(, 일본 연호로는 헤세이 27년) 6월에 정식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등재됐다.
 
== 교통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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