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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시'''({{llang|ko-CN|심양시}}(瀋陽)沈阳市)는 중국 [[랴오닝 성]]의 성도이고 중국성도이다. [[둥베이 3성에서3성]]에서 제일 큰 도시로서 경제, 문화, 교통, 군사의 중심지로,중심지이다. '''펑톈'''(奉天, 봉천)은 선양의 옛 이름이다. 이름의 유래는 선양 남부를 흘러 지나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심수지양(沈水之阳)에서 유래된다. [[국가역사문화명성]](國家歷史文化名城)에 선정된 관광 도시로, 만주족은 '''묵던'''({{llang|mnc|{{만몽 유니코드|ᠮᡠᡴ᠋ᡩᡝ᠋ᠨ}}|Mukden}})이라고 부르고, 유럽에서도 묵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역사 ==
이름의 유래는 선양 남부를 흘러 지나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심수지양(沈水之阳)에서 유래된다. 7200년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며, 구석기에 취락했던 신락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7세기 초반,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만주족의 [[누르하치]]는 선양을 점령하고 1625년 [[후금]]의 수도로 정했으며, [[1634년]]에는 성경(盛京)(만주어: 묵던)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을 점령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변경하지만, 선양은 제2의 수도 대접을 받아 [[1657년]]에는 봉천부라고 명명되었고, 형식적이나마 중앙정부에 준거한 관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시내에는 그 때의 황궁·선양고궁이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선양까지 한족의 이동을 인정하지 않았던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부)가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지역을 개방하자 선양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선양은 지역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동북삼성을 묶는 관청도 설치되었다. 도시로서 선양이 크게 팽창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 [[1905년]] [[러일 전쟁|러일전쟁]] 중에는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야전을 치렀다. 일본군은 3월 10일 펑톈에 입성하였고, 12월 3일에 서울에서 펑톈까지 협궤선이 개통되었다. [[1912년]] 청조 멸망 후에는 [[장쭤린]]이나 [[장쉐량]] 등의 선양 군벌의 거점이 되었고, [[1923년]] 선양 시 정부가 설치되고 시정이 시행되어 [[1929년]] [[장쉐량]]에 의해서 선양 시라고 개칭되었다. [[1924년]]에 [[대한민국]]의 [[독립군]] 삼부 중의 하나인 정의부가 [[지린 성]]과 펑톈을 중심으로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립 지사가 망명하여 활동했던 시기이며, 당시에는 '만주 봉천'으로 알려졌었다. 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가지의 대부분은 남만주 철도의 부속지로 여겨져 일본이 행정권이나 경찰권을 쥐고 있었다. [[1931년]] [[만주 사변]]에 의해서 일본의 [[관동군]]에 점령되면서, 그 이름을 펑톈이라고 하였고, [[1945년]]의 일본의 패전 후에는 선양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