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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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원]](元) 말기가 되자 스스로를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으로 칭하고,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다.
공민왕 11년인 [[1362년]]의 2월, 나하추는 [[고려]]가 수복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기 위해,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함경남도]] [[홍원군|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갔다. 이에 고려 조정은 [[조선 태조|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시|함흥]] 평야에서 나하추의 군대는 대패하였다. 이 때문에,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이 완벽히 몰락했다.
[[1386년]] 12월, 명 태조 [[주원장]]이 장군 풍승에게 요동 공격에 나서라고 지시하자 명군은 오늘날의 승덕 부근에 병참기지를 설치한 뒤, 1387년 6월 나하추를 공격하여 금산(金山) 지역을 장악했다.<ref name="Ming_Yodong_GongMinKing" /> 이런 상황에 기근까지 발생하자 나하추는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ref>명사(明史) 본기(本紀) 태조(太祖) 홍무(洪武) 20년(1387) 9월 무인(戊寅)일, 나하추가 수도에 당도하자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였다. (九月戊寅,納哈出至京,封為海西侯)</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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