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나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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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9년([[1540년]]) [[오와리 국]] 나카무라 촌에서, [[미카와 국]] 출신의 몰락한 다인(茶人) 치쿠아미(竹阿彌)와 히데요시의 친어머니 나카(なか,후일의 [[오만도코로]]) 사이에 태어났다. 나카는 첫남편 야에몬과 사이에서 히데요시를 낳았으나 [[오와리 국]]의 [[아시가루]](일개 병졸)였던 남편의 전사 후 재혼했다. 그래서 히데나가와 히데요시는 아버지가 다르다. (친동생이라는 설도 있다.) 동복 형 히데요시는 친모의 재혼 후 어린 나이에 절에 맡겨져 집과 연이 끊어졌고, 히데나가의 친아버지인 치쿠아미는 생활력이 없어 히데나가는 친모 나카와 함께 농사일 등 집안 일을 도맡아야 했다. 형 히데요시가 이마가와의 부하 마츠시다 집안에 취직했으나 실수를 저질러 쫓겨난 후 낙향하자 본격적으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형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고용돼 점점 출세를 시작하면서 비록 아버지가 다르다곤 하나 동복 동생인 그도 형 일을 돕기 위해 사무라이가 됐다. 당시 히데요시의 벼슬은 아시가루 소두(小頭)였다.
그의 일은 형이 정무와 전투 등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재정과 행정 일에서 형을 보좌하는 일이었다. 형이 욕심이 많아 일을 많이 벌리는 통에 뒷수습에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하며 재정 뒷받침을 위해
[[겐키]](元龜) 원년([[1570년]]) [[에치젠노쿠니|에치젠]](越前 ;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본거지가 있는 지방) 토벌 도중 노부나가의 매제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의
덴쇼(天正) 원년(1573년) 오다니 성 함락 및 노부나가의 친동생 오이치를 생환시킨 공로로 형 히데요시가 오다니 성주(영지 규모 10만여 석)가 되면서 히데나가도 1만 2천 석을 형으로부터 분봉받았다. 히데요시는
곧 이마하마에 새로 성을 신축하고 나가하마 성으로 이름을 고쳐 거성을 옮겼고, 히데나가가 성주 대리를 맡았으며 같은 시기 하시바 성을 창씨한 형과 함께 하시바로 성을 고치고 이름도 히데나가(秀長)라고 개명했다. 오다 집안의 역대 4중신 중 하나였던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의 이름을 땄다. 히데나가가 후일 자신의 오른팔로 성장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등용한 것도 이즈음이다. 이 주종 관계는 히데나가의 양자였던 히데야스(秀保)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도도가 다이묘로 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덴쇼 2년(1574년) 히데요시가 에치젠 잇코[[잇키]](一向一揆 ; 일종의 농민반란)와 대치하여 출진했기 때문에 형의 대리로써 나가시마(長島) 잇코잇키 토벌에 출진했다. 이 일은 《신초코키》(信長公記 ; 노부나가의 생애를 적은 서적)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미 무장으로서도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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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주고쿠 지방|주고쿠]](中國 ; 일본의 서쪽 지방을 일컫는 말) 방면 총사령관이 되어 다지마(但馬) 평정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때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에게 보낸 히데요시의 직필 편지에는 신뢰의 대명사로서 고이치로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히데요시 진영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덴쇼 5년(1577년)에는 [[다지마노쿠니|다지마 국]] 타케다성(竹田城)이 사이무라 마사히로(齋村政廣)에 의해 함락되자 성주 대리에
덴쇼 8년(1580년) 다지마 이즈시성(出石城)을 함락 후 다지마 평정을 완료했다. 히데나가는 이즈시 성으로 거성을 옮기고 다지마 7군(郡) 10만5천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에 올랐다. 이쿠노(生野) 은광의 관리도 맡았다.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 참전하여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군과 대치했다. 대치 도중에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가 거병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를 제압하러 간 사이에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이 본진에 침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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