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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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 없는글 삭제.그리고 삼국사기 사서에는 차별의 증거가 없음.금관가야는 처음부터 진골로 편입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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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국의 멸망 ===
가야의 패망이후로 가락국은 나라이름을 '''금관국'''(金官國)으로 바꾸었으리는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이후에 변한지방의 맹주로 떠오른 '''반파국'''이 [[대가야]]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비록 "가야"라는 이름의 본 주인이었지만 더 이상 가야라든가 가락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금관(金官)이라는 이름은 신라가 가락국을 합병한 후 가락국의 철을 자신들이 다스리겠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금관국이라는 국호는 가락국의 또다른, 혹은 새로운 이름이 되었고 여기서 "'''금관가야'''"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가야의 멸망에서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가락국은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후기에 들어서 대가야가 백제와 신라라는 양대 강국사이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가락국은 자주권을 잃고 신라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직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차지하면서 극성하던 [[496년]]에 가락국은 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신속의 의미였다. 대가야의 다른 지역에서 고총(高塚)이라는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고 있을 때 가락국은 그런 규모의 고분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음이 확인될 정도로 가락국은 완전히 쇠퇴해 있었던 것이다.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가락국의 [[다대동|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임나일본부|안라왜신관]]에 소속되어 [[안라국]]의 명령으로 가락국의 자주독립을 지원하고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일본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남가야는 산라와 백제 양쪽으로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532년 가락국왕인 [[구형왕]]은 결국 신라에 나라를 바쳐 투항함으로써<ref>《[[삼국사기]]》 〈[[:s:삼국사기/권34|권34]]〉 至十世仇亥王, 以梁中大通四年, 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10세(世) 구해왕에 이르러, 양 [[중대통]](남조 양(梁)의 무제(武帝)의 연호(529~534)이다.) 4년(신라 법흥왕 19년, 532년)에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ref> 가락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구형왕과 그 후손들은 구 가락국의 영역을 식읍으로발판삼아 받아진골로 경제적으로는편입되어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나중에 [[김유신]] 등의 후손들이 신라의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명목상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경원시되었다차별이 있을수 있었다고 본다.하지만 삼국사기나 사서에 그런 증거는 없다.이런 신김씨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은 [[김유신]]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제휴하면서부터로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 노력하는 한편 삼국통일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워서 집안을 여타 진골귀족들과 동급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고세웠다. 그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에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왕이 되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은 당나라의 발해침공시와 때를 같이하여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신김씨의 가세가 몰락한 계기는 [[780년]] [[혜공왕]]이 [[대공의 난]](大恭之亂)중에 피살당하는 것으로 무열왕계가 끊기고 [[선덕왕]]의 [[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부터인데 무열왕계의 황실과 밀착하고 있던 신김씨는 무열왕계가 멸망하자 기댈 곳이 없어졌고 다른 진골귀족들로부터도 다시금 경원당하면서 심지어 6두품의 하급귀족으로 추락했다. 고려시대 이후 신 김씨는 본관을 김해로 지정받아 '''[[김해 김씨]]'''가 되었다. 가락국의 고토는 신라의 병합이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고 [[680년]] 김유신의 조카인 [[문무왕]]에 의해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하고 16년뒤에 [[김해경|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명해 지금의 [[김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문무왕은 가야왕실의 외손으로 [[김수로왕]]의 능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도 했다. 신라말이 되자 가야왕실의 후손인 [[김인광]](金仁匡)이 강력한 사병군단을 기반으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을 칭하며 진례성(進禮城)을 중심으로 김해와 창원일대를 장악하였다. 김인광은 김해지역에 잔류해 있던 신김씨의 후손으로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906년]]에 김인광은 소충자(蘇忠子, 일명 蘇忠至)·소율희 형제에 축출당했고 이듬해에 충자가 사망하자 그 아우인 소율희가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어 김해, 창원및 함안지역을 다스렸다. 소율희는 나중에 자신의 성을 金씨로 고쳤고<ref>蘇자가 "쇠"를 가차한 것이라</ref> 관직명도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로 개칭하고 김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김인광, 김율희의 활약으로 고려시대에 김해지역이 역사상 "'''금관가야'''"로 인식되었다.
 
==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