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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에 대한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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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에 대한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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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曹操)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견부인이 [[조비]]에게 사사당하는 일을 겪었고, [[조비]]는 더더욱 조예를 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일 수 없습니다." [[조비]]는 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ref name="사마광">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ref>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조예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조정대신과 교류하거나 정사를 묻는 일 없이 오로지 책만 읽었다.<ref name="사마광"/> 즉위 초에는 학문에 힘쓰며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나, 곧 스스로 정치에 나섰다.
 
그는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조부 조조와 아버지 조비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베품으로써 앞서 조비 시기 때 처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촉한]]이 [[오 (삼국)|오]]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마의에게 절대 병권을 맡기지 말고 주변에 두고 감시하며 참모로만 쓰라는 조조의 유언을 무시한 사마의의 장군으로의 등용이, 조예 사후 사마의가 정권을 찬탈할 힘을 쌓을 기회를 준 측면도 있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을 새로 짓고 사치로운 생활을 하는 등 민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많이 하였는데 [[235년]] 허도에 큰 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고 [[낙양]]에도 조양전과 태극전을 짓고 총장관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10길에 달했고 숭화전과 청소각, 봉황루 등을 세우고 구룡지를 만들어 박사 [[마균]]에게 총감독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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