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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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함경남도]] [[함흥시|함흥]]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영화를 공부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감독 데뷔작으로 [[1941년]] 《반도의 봄》을 연출했다. 영화 속에서 영화 《춘향전》 제작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이병일이 설립한 [[명보영화사]]가 제작까지 맡았으며, 시기적 특성상 친일색이 있으나 노골적인 친일 영화는 아니다.<ref>{{뉴스 인용
|저자=강성률
|제목=일제말기 영화, 이렇게 친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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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에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영화부문과, 이 단체에 참가한 영화인들이 같은 달 말에 조직한 [[조선문화건설본부]]에 참가했다. 1945년 12월 [[조선프로레타리아영화동맹]]과의 통합으로 [[조선영화동맹]]이 발족했을 때는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영화동맹에서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안석주]]를 중심으로 [[우익]] 영화인들이 이탈하여 이듬해 3월에 친목 모임을 표방하는 [[영화감독구락부]]가 결성되었고, 이병일도 이 단체에 참여했다.
 
[[1946년]] 이병일이이병일은 《[[영화시대]]》에 기고한 글 〈전향기 조선영화의 진로〉라는 글을 보면투고하여, 문학계의 영화 매체에 대한 한계 지적을 반박하면서 예술의 독립성과 "조선색"을 강조하여 한국적인 영화 제작만이 한국 영화 발전의 길임을 주장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제목=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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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미국]]에 영화 유학을 한 뒤 귀국하여 [[1956년]] 연출한 《[[시집가는 날]]》이 이듬해 열린 제7회 [[베를린 영화제]]에 진출, 한국영화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기록을 남겼다.<ref>{{뉴스 인용
|제목=3대 영화제, 한국영화 역대 수상작은?
|url=http://spn.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28/2007052800175.html
|출판사=스포츠조선
|작성일자=2007-05-28
|확인일자=20072008-1005-2131
}}</ref> 《시집가는 날》은 [[오영진]] 원작의 연극 《맹진사댁 경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욕심 많은 맹진사의 신부 바꿔치기라는 한국적인 소재를 해학적으로 풀어내면서 금전적 가치에 대한 부정, 또는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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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참가한 행적 등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동생 [[이성구]]도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 《장군의 수염》 등을 연출한 영화 감독이라[[이성구]]와는 형제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이승훈
|제목=1960년대판 자유부인,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