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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망명 후 그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에 1931년 입교하고, 민족 정신의 창달에 힘썼다.
 
[[1942년]] [[11월]] [[일본 제국|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시간몇 시간 뒤에 사망했다. 이 당시 [[헤이룽장 성]] [[액하감옥]]에서의 일제의 고문은 가혹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로 인해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1명 중 10명이 살아나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 사망한 열명의 대종교인을 가리키는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이다.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