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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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가 뜻을 결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정에 비위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부호·명사들을 농락하면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가산군|가산]](嘉山)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 가신의 역속(驛屬)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문재(文才)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으며,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홍총각]], [[개천]]의 [[이제초]](李濟初)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 등을 비롯한 장사들을 모두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로 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시|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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