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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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42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수상자로 선정되지는 않았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를 [[유럽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유럽의 날]] 제정, 유럽 우표 발행을 제안하는 등 범유럽 운동을 전개했다.
 
국제 범유럽 연합이 [[나치 독일]]의 탄압을 받게 되자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1939년]]에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40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뉴욕 대학교1942년]]부터 교수로 근무하는 동안에 범유럽 운동을 전개했다.1945년까지 [[1945년뉴욕 대학교]]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럽으로교수로 귀환했다근무했다.
 
[[1945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프랑스로 귀환했다. [[1950년]]에는 [[카롤루스 대제상]]을 수상했으며 [[195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Légion d'honneur Officier), [[1962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대명예은현장(Großes Silbernes Ehrenzeichen mit dem Stern)을 받았다.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 [[1972년]]에는 [[서독]] 정부부터 대연방공로십자성장(Großes Bundesverdienstkreuz mit Stern)을 받았다.
 
==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