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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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만주 사변
|전체=[[중일 전쟁]]
|그림=Mukden 1931 japan shenyang.jpg
|설명=[[선양 시|선양]]을 침략하는 일본 관동군.
|날짜=[[1931년]] [[9월 18일]] - [[1932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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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국기그림|중화민국}} [[중화민국]]
[[파일:Flag of the Republic of China Army.svg|22x20px|border]] [[국민혁명군]]
|교전국2={{국기그림|일본}} [[
[[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
|지휘관1={{국기그림|중화민국}} [[장쉐량]]<br />{{국기그림|중화민국}} [[마잔산]]<br />{{국기그림|중화민국}} [[펑잔하이]]
|지휘관2=[[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혼조 시게루]] <br /> [[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미나미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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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만주 사변 전투}}
{{2차대전으로 가는 길}}
'''만주 사변'''(滿洲事變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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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이 [[관동군]]의 계략으로 피살됨으로써, 관동군과 봉천파 간의 협조 관계는 종결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북경을 점령한 뒤 청일통상조약(1896년)을 폐기한다고 일본에 통고하였다. <ref name="이이화"/> 이는 국민당 정부가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배일공세를 취하기 위한 신호였다. <ref name="이이화"/> 일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년)하게 되자 만주에서도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제국주의적 이권을 다시 회수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쉐량 정권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 철도]]의 회수, 영사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주장했다.<ref name="역사비평"/> 이로 인해 일본인의 동북 지역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ref name="역사비평"/> 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에 의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 70% 이상이 일본의 자본이었을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ref name="남경태"/> 그러나, 1929년 발생한 세계 경제[[대공황]](1929~39년)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ref name="남경태"/>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의 제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것을 <만·몽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관동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시데하라 외교(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의 국제협조노선에 바탕한 경제외교)의 연약함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무력에 의한 동북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ref name="역사비평"/>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했다.<ref name="남경태"/> 이렇게 보면 만주 사변은 사실상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인 것만은 아니었다.<ref name="남경태"/> 이런 상황에서 1931년 6월 [[나카무라 대위 사건]]
== 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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