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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의 성쇠 ====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네덜란드는 17세기 전반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번영하여 황금기를 맞이했다.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때부터 해외 발전을 도모하여 특히 리스본에서 축출되자 밀무역을 하여 에스파냐의 통상을 방해하고 직접 동양 무역에로 진출하였다. 1602년에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차례차례로 빼앗아서 동양 무역을 지배했다. 그러는 동안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해 에스파냐와 교대되어 세계의 해상권·무역권을 쥐었다. 수도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상업·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최초의 보험회사가 설립되어 암스테르담 은행도 개업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영국이 발한 항해조례(航海條例)로 인하여 타격을 받고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도 패퇴하여 세계 무역의 패권을 영국에 뺏기고, 점차로 네덜란드는 쇠퇴해 갔다. 이것은 네덜란드가 동양 무역의 이익에 현혹되어 국내의 모직물 공업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데는 게을리하고 국력의 기초를 중계 무역에 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오스만 투르크의 후퇴 ====
술레이만 1세가 죽은 후 오스만 제국은 범용(凡庸)한 군주들이 잇고, 1571년에는 레판토 해전에서 에스파냐·교황·베네치아의 연합 함대에 대패했으나 유능한 재상이 술탄을 도와서 제국의 위세(威勢)는 그 뒤 얼마 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 쇠퇴의 징조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궁정에 있어서 하렘의 권력이 증대하여 정치를 문란케 했으며, 과중한 세금은 사람들을 괴롭혔고, 제국 각지에는 반란이 빈발했다. 또한 유럽 여러 나라의 압력은 강해지고 배후에서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오스만 제국을 위협했다. 16세기 후반에는 또다시 강력한 재상이 잇따라 나와서 국정의 개혁을 단행하고, 동유럽에 대하여 공세로 전환했으나 이러한 대외 적극책은 성공을 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메메트(마호메트) 4세(재위 1648 1687) 때의 재상 카라 므스타파의 무모한 대외 원정은 오히려 동유럽에서의 투르크 세력 후퇴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1677년 대군(大軍)을 이끌고 우크라이나에 침입했으나 러시아군과 싸워 패하고 1681년에 화해했다. 이어 헝가리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란을 이용하여 1683년 제2차 빈을 포위했다. 그러나 이것도 폴란드 왕과 독일 제후의 원군(援軍)에게 패하고 그는 책임을 추궁받아 베오그라드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측의 반격이 강해지고 1686년에는 부다페스트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자 헝가리는 마침내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97년 젠타의 패전 후, 1699년 투르크는 카를로비츠에서 조약을 맺어 유럽 여러 나라에 대하여 오로지 수세(守勢)에 서게 되었다.
 
=== 서아시아 ===
사파비(Safavi) 왕조는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서 아바스 1세의 즉위로 가장 빛나는 시대를 맞이했다. 그는 힘과 교묘한 외교로 동(東)이란과 메소포타미아에 영토를 확대하고, 국내적으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수도 이스파한은 장려(壯麗)한 모습으로 유럽 여행자를 놀라게 했고, 페르시아어는 서아시아의 국제어가 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을 적대시하던 유럽의 여러 나라는 서로 줄지어 이란에 사절을 보내어 우호 관계를 희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의 번영은 아바스 1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왕이 죽은 후 10년도 되지 않아서 메소포타미아는 재차 투르크에 빼앗기고 왕조는 쇠망의 일로를 더듬었다.
 
=== 인도 ===
16세기 후반 악바르 대제(大帝)부터 17세기 후반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는 기간은 무굴 제국의 최성기(最盛期)였다. 악바르 다음 자한기르를 거쳐, 샤 쟈한 황제 때에는 재정 수입도 최대였고, 영토는 데칸 남부까지 확대되었다. 면포(綿布)나 인디고의 생산·수출도 성대(盛大)하였고, 지배층의 사치를 타고 상업도시가 각지에 번영하였으며, 수도 아그라는 영국인으로부터 ‘세계 최대의 도시’라 불리었다. 그 부력(富力)으로 타지 마할 등 호화로운 궁전과 사원이 건조되었고, 페르시아식 미니어처의 전통을 잇는 무굴의 회화(繪畵)는 궁정의 보호하에 힌두교적 미니어처로, 라지푸트 회화는 라지푸트 제후 밑에서 발달, 인도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번영의 그늘에서 농민은 화폐 경제의 침투와, ‘모래에서 기름을 짠다’는 중세(重稅)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우랑제브 황제 때 제국 영토는 가장 컸으나 농촌의 황폐는 계속되었고 농민의 저항은 격화되었다. 황제의 힌두교 탄압 정책은 무굴 지배의 지주(支柱)였던 라지프트 제후를 이반(離反)시켜, 18세기에는 마라타 동맹·시크교도의 반항이 점차 격화되어, 제국의 통일은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이때 포르투갈에 대체하여 진출한 프랑스·영국은 제후의 할거(割據)·항쟁(抗爭)을 이용하여 위치를 굳히면서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
 
=== 동남아시아 ===
16세기 말 포르투갈인에 고용되어 현지를 여행한 네덜란드인 린스호텐이 『동인도 항해지(航海誌)』를 간행하자, 네덜란드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갑자기 높아졌다. 1595년 최초의 상선대(商船隊)가 자바섬에 파견되고,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609년에는 동인도 총독부가 발족하는 등 급격한 진출 붐을 일으켜 암본에 근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인을 구축(驅逐), 몰루카 제도(諸島) 등의 향료 무역을 독점했다. 동인도회사는 1623년 암보이나의 영국인을 학살하고 영국 세력을 몰아내(암보이나 사건), 자바·수마트라·몰루카 이외에 말라카·실론·케이프타운을 영유(領有), 대만에도 진출했다(제란디아 성). 또한 통상 독점에 대응하여 인도네시아 내부 지배를 강화하고 직할령·보호령을 확대하여 강제 재배 제도 등 가혹한 주구(誅求)를 행하여 원주민 사회를 파괴했다.
 
=== 북아시아 ===
청은 17세기 초 만주 남부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하고 넓은 동아시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는데, 북아시아에 대하여는 이미 태조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 흑룡강 유역까지 지배의 손을 뻗쳤다. 내몽골 방면에 있어서는 차카르부(部)나 내(內)카루카부(部) 등을 태종 때까지 남김없이 복속(服屬)시켰다. 거기에 외몽골 일대의 외칼카부도 강희제(康熙帝) 시대에 복속시켜, 때마침 동진하고 있던 러시아와 흑룡강 방면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당시의 유럽 여러 나라가 해로(海路)를 통하여 아시아 진출을 시도하고 있던 중에 홀로 육로를 통하여 북아시아에 동진(東進)하여, 17세기 중엽에는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고, 다시 흑룡강 유역에 육박했다. 1689년 청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흑룡강 유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북아시아 지배는 외몽골 방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캄챠카 방면으로도 뻗어갔다.
 
=== 중국 ===
중국사상 17세기는 명·청 교체기에 해당하는데, 명과 교체된 청이 중국 지배를 확립하여 전성기로 향하는 시대이다. 청은, 명이 한민족(韓民族) 왕조임에 대해 만주족 왕조이며 건주(建州)의 여직부 출신인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여 1616년에 세운 후금국(後金國)으로 시작하였다. 태종 때, 내몽골과 주변을 굴복시키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고침으로써 명 정복의 체제가 착착 갖추어져 갔다. 이에 대하여 명의 정계(政界)는 당쟁(黨爭)으로 세월을 보내고 잇따른 증세(增稅) 등으로 민중의 궁핍이 점점 심해 마침내 이자성(李自成)의 난이 일어나 명은 멸망했다. 이 기회를 타고, 만주족은 태종의 아들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를 옹호하여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가, 청(淸)의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1644). 이어서 화중(華中)·화남(華南) 각지에 모인 명의 잔존 세력을 배제하여 1661년 명의 유족을 완전히 넘어뜨리고 청의 통일이 일단 완성됨과 동시에 강희제 시대에 들어갔다. 이러한 청의 중국 정복에 투항한 한인(漢人)이 많이 이용되었는데 그 공로로 오삼계(吳三桂) 등은 화남 각지에 봉(封)함을 받아 점차 강력하게 되어 강희 연대에 들어와 결국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청은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고유의 팔기병(八旗兵)과 함께 새로 편성한 녹기병(綠旗兵)을 기용하여 반란을 평정, 이어서 대만 정성공(鄭成功)의 저항도 평정하여 청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었다. 그 후 내정(內政) 충실에 주력하여 대외적 발전도 현저해져 청조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다.
 
== 18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