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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봉쇄령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1811년 대륙봉쇄령을 더 이상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무력 제재를 가하기 위해 1812년 6월 러시아에 침입하였으나 모스크바에서 패퇴하고 몰락하였다.
 
==== 오스만 투르크 쇠운 ===
17세기 말의 카를로비츠 조약에 의해서 표면화된 오스만 제국의 쇠운은 18세기가 되자 유럽 열강, 특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압력에 의해서 한층 심해진다. 18세기 초에 즉위한 아흐메트 3세(재위 1703 1730)의 치세 전기에는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렀다. 먼저 1710 1711년에는 북방(北方)전쟁에 관련되어서 표트르 대제(大帝)의 러시아와 싸웠고, 이어 오스트리아와 싸워서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서 오스만 투르크는 헝가리의 나머지와 소(小)왈라키아, 북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에 빼앗겼다. 후반엔 평화가 계속되고 프랑스의 궁정(宮廷)문화가 도입되어, 소위 ‘튤립 시대’라 불리는 화려한 태평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1730년에 예니 체리의 반란이 일어나서 아흐메트 3세는 자리에서 쫓겨나고, 이후 술탄의 폐립(廢立)이 반복되었다. 1736 1739년, 폴란드 계승전쟁에 관련되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투르크에 침입해 왔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격퇴시켰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자 러시아의 남하(南下)정책은 한층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1768 1774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은 투르크의 패배로 끝나고, 1774년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의 투르크에 대한 내정간섭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어 투르크의 국제적 지위를 저하시켰다. 이어 러시아는 크림 한국(汗國)을 병합하였고, 1787 1791년의 전쟁에 의해서 도니에스트르강(江)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 서아시아 ===
사파비 왕조의 번영기가 지나자, 이란은 20세기까지 긴 쇠퇴의 시대로 들어갔다. 18세기는 페르시아 문학이나 문화에 있어서 가장 불모(不毛)의 시기였다. 사파비 왕조 제9대 왕 후세인(재위 1694 1722)은 재정 궁핍에 고민하여 농민에게 중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불만이 고조하였다. 이 국정의 어지러움에 편승하여, 1722년 아프간족이 침입하여 이스파한을 빼앗고 1729년까지 이란을 지배했다. 재기를 꾀하는 사파비 왕조의 왕을 도와서 아프간족을 격퇴시킨 나디르 쿨리는 1736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나디르 샤라 칭하고 아프샤르 왕조를 수립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복종시켜 북인도에 침입하였고, 또한 중앙아시아의 보하라 한국과 히바 한국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1747년에 그가 암살당하자, 이란은 또다시 분열상태에 빠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자립하여 아프간족의 민족적 독립을 실현했다. 이란에서는 카림칸(汗)이 호라산을 제외한 전국을 통일하여 젠드 왕조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젠드 왕조의 지배는 반세기도 가지 못하였고, 1779년에 자립한 카자르 왕조가 18세기 말에 젠드 왕조와 아프샤르 왕조를 멸망시켜 이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또한 중앙 아시아에서는 18세기 초 우즈베크족에 의해서 코칸트 한국이 성립되었다.
 
=== 인도 ===
무굴 제국의 통일이 무너지고 있을 무렵 프랑스, 영국의 동인도회사 세력다툼이 전개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당초 뒤플렉스 지도하에 우세하였는데, 클라이브의 활약으로 영국 세력이 회복되고 1757년의 플라시 전투 이후에는 영국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마드라스, 벵골 등에서 인도인 토후(土侯)로부터 지세 징수권을 획득하여 토후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 강화시켜 나갔다. 여기에 대해서 인도인은 마이소르 전쟁·마라타 전쟁·시크 전쟁 등의 반영(反英) 투쟁에 봉기했다. 그러나 하이데라바드나 마라타가 마이소르의 저항(抵抗) 진압에 협력하고, 마라타 제후(諸侯)의 세력싸움에 영국 세력을 이용하여 영국 세력의 신장(伸長)을 초래했다는 사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관된 지도와 통일적 조직이 결여된 반영(反英) 투쟁은 봉건세력의 동요와 내분으로 각기 격파되어, 19세기 중반의 시크 교국(敎國)의 반항을 최후로 영국 세력이 인도 전국을 휩쓴다. 동인도회사는 무굴 황제와 제후로부터 징세권(徵稅權)을 획득하고 황제에게는 연금을 지급한다는 형식으로 지배지역을 확대해 나갔는데, 1774년 레귤레이팅법(法)에 의해서 본국의 회사 감독권이 강화되었고, 벵골의 지사(知事, Governor)는 총독(總督, Governor-General)이 되었다(초대는 헤이스팅스). 1793년의 영구지조(永久地租) 설정(→자민다르)은 1813년 동인도회사의 인도 무역 독점권의 폐지와 함께 농촌의 파괴, 영국 상품의 유입에 박차를 가했다.
 
=== 동남아시아 ===
청(淸)나라는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아, 대청제국(大淸帝國)은 동아시아의 거의 전지역을 세력하에 두었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방면에도 많이 진출했다. 베트남에는 서산당(西山黨)의 난(亂) 때에 남정군(南征軍)을 보내고 그 후 바로 발족한 완(阮) 왕조를 베트남 국왕에 봉했으며, 시암의 차크리 왕조를 시암(Siam) 국왕에 봉했다. 또한 미얀마의 알라웅파야 왕조 성립 때 출병하여 미얀마(Burma) 국왕에 봉하여 각각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나라들에 대한 청의 종주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후에 복잡한 국제문제를 야기시키는데, 18세기에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유럽 제국의 진출에 있어서는, 인도에서 영국에 패한 프랑스가 완 왕조의 통일을 원조하여, 후의 인도차이나 진출의 실마리를 겨우 열 정도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자바섬 정복은 착착 진행되어 18세기 말까지에는 자바 전체를 수중에 넣고, 동시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성립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북아시아 ===
청은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헤이룽강(黑龍江) 유역 이남을 확보해 왔는데 다시 외몽골 방면에서도 이때까지 때때로 침입하여 청의 지배를 방해하고 있던 일리(Ili) 지방 준가르부(部)의 세력을 일소하고, 외몽골은 물론 일리 지방에서 신장(新疆)·티베트·칭하이(靑海) 방면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됐다. 통치에 있어서는 회유책(懷柔策)을 취하여 그들의 자치에 위임함과 동시에 중앙의 이번원(理藩院)이 통괄하였다. 러시아는 청(靑)에게 헤이룽강 방면으로부터 쫓겨간 후 외몽골 방면으로 향했고, 새로이 캬흐타 조약을 맺어 이 방면에서도 양국 관계가 조정되었다. 또한 캄차카 방면에는 이미 17세기 말에 거기에 가 있었으나 수차례 탐험 조사에 의하여 이곳을 영유하고 베링 해협으로부터 알래스카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와 같이 청은 국경을 확보하고 북아시아 진출을 과시하였으며, 러시아 또한 시베리아를 확보하고 동북에의 진출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 중국 ===
청조(淸朝)는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하여 명조(明朝)와 바뀌었고,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3대(三代)의 잇단 외정(外征) 결과, 동북 지방에서 외몽골·신장(疆疆)·칭하이(靑海)·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지배하고 그 주변의 지역을 속국으로 하여 중국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옹정제(雍正帝) 시기에는 지정은제(地丁銀制)의 시행으로 명조말 이래의 세역(稅役) 개혁을 일단 해결하여 국가 지배의 기간(基幹)인 세역제도를 안정시켰고, 일련의 지방 재정 개혁으로 국력의 충실을 초래하여 건륭 시대에는 청조 최성기를 이루었다. 이 명·청 이행기(移行期)의 역사적 의의는 단지 왕조의 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 발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획을 긋고 있다. 즉 명대 후반기 이후의 시비기술(施肥技術) 발달과 윤작품종(輪作品種)의 다양화, 특히 강남(江南)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 수공업의 광범한 상품 생산화 등으로 소농 경영의 상대적인 안정화를 기하여 소농 상호간의 지연적(遲延的) 결합과 공동체적 여러 관계의 강화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송대(宋代) 이래의 대토지 소유 양식까지도 변화시켜 지주층은 지방정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지역에 있어서의 정치적 지배를 실현하고, 이것을 발판으로 하여 자주성과 지연적 결합을 강화하여 온 농민에의 지배를 유지하려 하였다. 명조(明朝)말부터 관료 혹은 예비군(豫備軍)으로서의 거인(擧人)과 생원층(生員層)은 향신(鄕紳)이라 불려 사회의 지배 신분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의 의향을 무시하고서는 지방정치가 원활하게 행해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이상과 같은 사태의 출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청조(淸朝)의 중국 지배도 이러한 여러 조건 위에 세워져 있다. 지정은제(地丁銀制)에 의하여 세역부과 대상이 전토(田土)에 집중되어 명대(明代)의 이갑제(里甲制)에 대체하여 촌락이 세역 수취(收取)의 기초가 된 것은 소농 경영의 안정화와 향신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의 진전에 대응한 것이며, 강희(康熙) 건륭(乾隆)의 중복된 외정(外征)으로, 고대로부터 중국으로서는 최대의 군사 위협이었던 북방 유목민족의 압력을 최종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 발전과 그것을 재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세역 개혁의 결과이다. 또한 선행(先行)한 요(遼)·금(金)·원(元) 등의 이민족(異民族) 왕조와 달리 과거제도가 관료 등용의 기본축으로서 유지되어, 중앙관청에 만한병용제(滿漢倂用制)가 채택된 것은 지배 신분으로서의 향신층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된 것을 반영하고 있으며, 방대한 칙선서(勅選書) 편찬에 따라서 일어난 문자(文字)의 옥(獄)은 이러한 향신층을 청조 지배의 사회적 지주로 만드는 당근과 채찍의 정책이었는데, 동시에 만인(滿人) 황제가 스스로 한문 문집을 저작하거나 한 것은 향신층을 담당자로 하는 전통적인 중국 문화에 대한 굴복마저도 표시하는 것이다. 총괄적으로 건륭기(乾隆期)까지의 청조 지배하의 중국사회는 중국사상에 있어 봉건사회가 가장 성숙한 시기이며, 대외 무역을 거의 광둥(廣東)의 한 항구에 한정한 자족폐쇄적(自足閉鎖的) 체제 아래 동아시아에 대제국을 형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 19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