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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
청조의 전성기라 불리는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시대가 지나가자 청도 쇠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건륭 말년에 관계(官界)는 부패가 극단에 달해 권신(權臣)들이 뇌물로 치부하여 가경제(嘉慶帝)로부터 사형에 처해진 사건은 전성기의 종말을 고하는 경종이기도 하였다. 관료는 주로 지주 출신이며, 갖가지 특권을 누려 대토지를 차지하고 ‘향신(鄕紳):(不在 대토지 소유자)’으로서 지방에서도 권세를 떨쳤다. 한편 생산력이 미숙한 농촌에 화폐경제의 침투는 결과적으로 상인의 중간 착취를 촉진시켜 곤궁한 전호(佃戶)가 항조(抗租)를 하게 되면 중소지주도 항량(抗糧)하는 등 악순환을 낳아 서서히 사회 불안을 조장하였다. 청조권력(淸朝權力)의청조 권력의 기반인 만주의 팔기병(八旗兵)은 태평천하에 젖어 화려한 도시생활만 누리다가 궁핍화한 나머지 종종 부채로 인하여 기지(旗地)를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세기 말에 백련교(白蓮敎)의[[백련교의 난이난]]이 일어났으나 팔기로서는 진압할 능력이 없어 지방의 향용(鄕勇)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후 ‘반청(反淸)’ 폭동이 각지에서 빈발하여 청조(淸朝)의청조의 지배는 흔들리게 되었다. 청은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견지하여 광저우 항구를 창구(窓口)로창구로 하는 제한 무역을 행하고 있었으나, 18세기 말경부터 영국은 대(對)중국 무역을 적극적으로 시행, 1840년 아편전쟁을[[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이어 청(淸)으로청으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게 하였다. 이어 청은 1856년 [[애로호(號) 전쟁에서도사건]]에서도 영국·프랑스에게 패배하고, 열강의 반식민지(半植民地)로서 굴욕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 동남아시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