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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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극돈과 유자광, 신수근 ===
실록<ref>연산 4년 7월 29일 2번째기사</ref>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ref>앞과 같음, 交相傾軋, 將成牛、李之黨。</ref>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실록<ref>연산 4년 7월 29일 2번째기사</ref>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ref>앞과 같음, 交相傾軋, 將成牛、李之黨。</ref>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과 훈구의 대립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썼을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그는 유자광에게 찾아가 의논을 하였고, 유자광은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에게 가 세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에게 합류를 요청했다<ref>연산군일기, 4.7.29계해</ref>.
 
 
이처럼 국왕을 제외하면, [[유자광]]은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성종|성종]] 때 [[김종직]]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때마침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해 상의를 해오자 민첩하게 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지금은 조정을 개혁하는 시기니 크게 처벌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고, 사건의 확대와 엄벌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대로 사건이 전개되지 않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들고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하며 즉시 주석을 달고 구절마다 해석해 국왕이 쉽게 알도록 했다.<ref>연산군일기, 4.7.29계해</ref>
 
 
[[신수근]]은 [[김종직]]이나 [[김일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출세를 반대한 것이 [[삼사]]([[사림]])였기에, [[김종직]], [[김일손]]과 함께 사림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두 사람과 합류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