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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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 두 가지로 대별하고 사무라이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 지휘관으로서 기사와 보사를 두었다. 이렇게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에 대규모 건조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조선 침공 직전에 전함 천여 척을 이미 확보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는 3천여 척이나 되는 대규모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고 조선을 침공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산요도]], [[산인도]], [[기나이]]와 그 동방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병력 33만을 동원할 준비하였다.
 
[[1586년]]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유럽의 [[범선]]인 [[카락]]과 [[갤리온]] 구입을 시도했었는데 [[포르투갈]]인의 거절로 구입에는 실패했다<ref>이상윤 (2010년 2월 22일) 《기술,배,정치-기술배정치는 세계패권을 어떻게 바꿨는가?》 높은새, 297쪽. ISBN 978-89-93989-02-1</ref>. 당해 5월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한 [[예수회]] 일본 준관구장 [[가스파르 코엘료]]([[:en:Gaspar Coelho|영어]], 신부)는신부는 그에게 포르투갈 배의 구입과 항해사의 고용 알선을 명받았다. 그러나 [[1587년]] [[지쿠젠 국]] [[하카타]]에서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지고 이로 인해 예수회 선교사들이 [[규슈]] 서남 지방으로 잠복하게 되어 예수회는 직접적으로 전쟁(후의 임진왜란 등)에 가담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 예수회는 애초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전쟁을 불의한 전쟁으로 보았으며,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볼 때, 권력 투쟁의 불안과 침략 전쟁(임진왜란) 기피로 일본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만일 반란이 일어나면 히데요시가 실각하게 되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직위를 보전하게 되고 사제 추방령 철폐, 선교 활동의 자유도 보장되리라 예상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런 사태를 잘 처리하였기에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ref>《한일 주교 교류회 강의 자료》, 고노이 다카시(일본 동경 대학교 교수·일반 그리스도교 역사), 2000년 1월 252호</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