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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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국의 군정기|연합군 점령하의 일본|특수위안시설협회}}
 
[[1945년]] [[광복]] 이후 북위 38도선 이남 한반도의 구 일본군 주둔지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일본-조선[[일제 병합시기때강점기]] 때 형성된 구 일본군 주둔지 주위의 기지촌 대부분은 운영을 지속하고 있었다.<ref name="들소리신문20080218">[http://www.deulsori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58 21년 간 기지촌 여성들의 삶 함께 한 ‘두레방’] 들소리신문 2008.02.18</ref> 미군기지 주변으로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소매업과 유흥업이 성행했고 미군 병사를 상대로 한 [[성매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 [[주한 미군]]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던 접객여성 등록 검진 규정을 유지하였으며, 공창 및 사창 폐지에는 관심이 없었다.<ref name="한겨레2120111128">[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0838.html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성매매 단속하는 척하며 여성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여겼던 한국 정부… 한국전쟁 때 위안소 설치하고, 독재정권은 주한미군·일본인 대상 성매매 조장해] 한겨레21 2011.11.28 제887호 </ref>
 
전후 한국과 더불어 미군이 주둔한 일본에서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애국심이 투철한 일본 여성들에게 자신을 희생해 다른 일본 여성들의 정조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미군 위안부를 모집했으며<ref name="뉴욕타임스19951027">[http://www.nytimes.com/1995/10/27/world/fearing-gi-occupiers-japan-urgesd-women-into-brothels.html?pagewanted=all&src=pm Fearing G.I. Occupiers, Japan Urgesd Women Into Brothels]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October 27, 1995</ref> 이에 [[도쿄]]에서만 여성 1,360명이 몰렸고,<ref name="중앙일보2009081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3726926 맥아더가 만들었다 ‘반쪽짜리’ 일본 민주주의] [[중앙일보]] 2009.08.14</ref> 이후 매춘굴은 30여 곳으로 확대되었다.<ref name="중앙일보20090814"/> 미군 위안부 중에는 하룻밤에 미군 47명을 상대한 여성도 있었다.<ref name="뉴욕타임스19951027"/> 미군의 상대를 한 일본 여성은 사무직도 포함하면 55,000명에 달했다.<ref name="뉴욕타임스199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