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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젠탈은 [[갈리치아]] 지방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 지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고, [[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독일인]]·[[유대인]] 등이 복잡하게 섞여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에 속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우크라이나]]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 한편 비젠탈의 부친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 전투에서 전사했고, 아버지를 잃은 비젠탈 가족은 [[빈]]으로 옮겼다. 그 후 그는 [[프라하]]의 기술 대학교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하여 기술자로 잠시 [[소련]]에서 일하다 [[폴란드]] [[르부프]](현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에서 지냈다.
 
[[1939년]] 르부프가 소련에 점령되었고, 그는 건축업을 할 수 없게 되고 [[시베리아]]의 노동 수용소([[굴락]])으로 추방될뻔 하다가 위기를 면했다. 그러나 그 후 [[독일]]에 점령당하자 유대인인 그는 강제수용소행을 피할 수 없었으며, 여러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했다. 그의 친척과 가족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고, 그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1945년 5월]] 해방을 맞아 풀려났고, 그 후 [[오스트리아]]에 주둔하던 미군을 도와 전쟁 범죄 자료를 모으는 일을 했다. [[1947년]], 그는 여전히 미군 관리하에 있던 [[린츠]]에 자료센터를 설립하였다. 린츠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출신지로, 그 곳에서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후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협력하여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잠복해 있는 것을 찾아내 그를 이스라엘로 송환하였다. 새로운 문서 자료센터가 [[1961년]] 빈에 문을 열었고, 계속하여 많은 유대인 학살 관련자들을 추적하여 고발하여 그는 '나치 사냥꾼'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이름을 기리는 [[지몬 비젠탈 센터]]가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개설되어 홀로코스트 만행을 고발하는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토막글|오스트리아}}
{{추축 전범들의 전후 탈주}}
{{Authority control}}
 
{{기본정렬:비젠탈, 시몬}}
{{토막글|오스트리아}}
 
[[분류:1908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