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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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 (1915년)|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91200329203002&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9-12&officeId=00032&pageNo=3&printNo=13528&publishType=00020"北韓(북한)은 金日成(김일성)의 개인兵營(병영)] 경향신문 1989년 09월 12일 3면"</ref>
 
일본의 진보성향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은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말했다.<ref name="wa">[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07/2014060700026.html 김일성 보천보전투 신화는 과장] 조선일보 2014-06-07</ref><ref name="suh"/><ref name="ki"/>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ochonbo_Incident 보천보 사건 당시 신문 기사 보기]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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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사건은 규모가 좀 컸다는 것 외에는 1920~30년대에 만주 무장단체들이 조선국경을 침입하여 벌인 무수히 많았던 약탈 사건들<ref>[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80&docid=0027126862 1920년~1936년간 국경 3도 비적 누년 상황표 (國境三道 匪賊 累年 狀況表)] (대정9년 -소화1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862 원문 바로보기])<br/>[http://theme.archives.go.kr/next/government/viewGovernmentArchivesEvent.do?id=0001563997&docid=0027126469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帝國議會) 설명자료] 昭和12年(1937년) 조선총독부 경찰청 경무국 : [http://theme.archives.go.kr/next/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27126469#6 (원문 바로 보기)] - p.6 : 1932년~1937년 9월 기간 대안비적 선내침입누년표(對岸匪賊 鮮內侵入 累年表) / p.7 : 압록강·두만강 대안 마비적(馬匪賊) 출몰 누년표 (1932~1937.9)</ref>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곧 잊혀졌고, 해방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이 사건을 신문이 크게 보도하여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그 유명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대다수 신문이 보도했으므로<ref name="news"/> 그가 전사했다는 것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보천보 사건도,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거의 알지 못했다.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난 후 자신의 항일투쟁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1935년 2월에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10_1_0026163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일으킨 [[동흥습격사건|동흥(東興) 습격 사건]]은<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40020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4&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0&publishType=00020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侵入(인민혁명군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동아일보 1935.02.14<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500209102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5&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1&publishType=00010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21600209102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2-16&officeId=00020&pageNo=2&printNo=5102&publishType=00010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동아일보 1935.02.16<br/>[http://db.history.go.kr/id/npjj_1935_02_16_x0002_0820 즉사 중경상 납거 등, 피해자 23명, 사자 8, 중경상 5, 납거 10명, 동흥 습격사건 後報/ 주민측 피해/ 공산군을 계속 추적 중]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16일 2면</ref><ref>[http://www.i815.or.kr/data2/ganhaeung/thesis/1994/199413.pdf 장세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37~369</ref>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보천보 사건을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지만<ref>[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606y00_02.pdf 咸南國境에 第二東興事件 / 惠山鎭 管內 普天堡에 共産匪 百餘名 來襲]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6월 06일 02면 01단</ref><ref name="choi"/>, 오늘날 동흥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문연구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를 보아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만한지 알 수 있고,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투쟁 업적이라는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알려진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 때문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구성원들 수백명까지 검거되어 처벌받는 소위 [[혜산사건]](惠山事件)으로 지하 조직이 궤멸되었다.<ref name="wa"/><ref name="suh">[http://lib.kinu.or.kr//wonmun/003/0000786733.pdf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p.202~203 : 사실은 보천보 전투가 국내진공이라 는 선전효과는 거두었지만 전투의 실질적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다.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보 전투 이후 일본 관헌측은 필사적으로 토벌을 전개하였다. 장백현의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체포되어 거의 궤멸되었고, 김일성부대는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당하여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ref><ref name="ki">[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03043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현실 28, 1998.6, 254-291 (38 pages) p.258 : 739명이 검거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07/2014060700026.html 김일성 보천보전투 신화는 과장] 조선닷컴 2014.06.07</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