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다노 브루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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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iordano Bruno Campo dei Fiori.jpg |thumb|230px|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조르다노 브루노'''({{llang|it|Giordano Bruno}}, [[1548년]] ~ [[1600년]] [[2월 17일]])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이며 [[철학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도미니코회]]의 수사로 활동했으나, 후에 [[개신교]]인 [[칼뱅파]]로 개종했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1576년]]에 [[나폴리]]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전설]]을 말하거나 학문을 가르쳤다. [[라틴어]]·[[희랍어]]에 능통하였고 다방면에 박식하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피치노]]나 [[피코]] 등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마술 (종교)|마술]]이나 [[점성술]]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591년]] [[베네치아 공화국]](현재의 [[이탈리아]]의 일부)에서 잡혀 8년 간의 감옥 생활을 했고, [[로마 교황청]] 이단 심문소로부터 이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브루노의 발언이나 주장 가운데 가장 이단으로 여겨진 부분은 그의 세계관과 우주관이었다. 그의 우주관은 말하자면,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무한 우주론을 부정하는 로마 가톨릭교회 주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쉽게 주장할 수 없었다.
브루노의 무한 우주론은 [[지동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주장되고 있던 지동설은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항성은 [[천구]]라고 하는 공에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로마에서 그는 7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노나 탑]]에 갇혔다. 그는 8년 동안 가혹한 심문을 당하며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었다.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 중 하나는 [[1940년]] 발견된 요약집이다. <ref>[http://asv.vatican.va/en/doc/1597.htm '''Vatican Secret Archives:''' Summary of the trial against Giordano Bruno], Rome, 1597</ref> 그가 지은 책과 그가 증언했던 데 대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죄목에는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리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 그리고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들에 대한 것이었다. 루이지 피르포(Luigi Firpo)는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전한다.<ref>Luigi Firpo, Il processo di Giordano Bruno, 1993</ref>▼
▲심리 과정의 일부 중요한 문서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문서는 남아있으며, 그 중 하나는 [[1940년]] 발견된 요약집이다. <ref>[http://asv.vatican.va/en/doc/1597.htm '''Vatican Secret Archives:''' Summary of the trial against Giordano Bruno], Rome, 1597</ref> 그가 지은 책과 그가 증언했던 데 대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며, 죄목에는 신성모독, 비윤리적 행동, 교리에 대한 이단적인 해석, 그리고 그의 철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들에 대한 것이었다. 루이지 피르포(Luigi Firpo)는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전한다.<ref>Luigi Firpo, Il processo di Giordano Bruno, 1993</ref>
# [[기독교]] 믿음과 교리에 배치되는 의견.
# [[삼위일체]]를 부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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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는 [[베네치아]]에서 변호에서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유지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브루노는 세상이 하나뿐이 아님을 믿었으나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그 생각을 포기하라고 강요당했다.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등의 지식인들은 1899년 사상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브루노를 기리며 그가 화형 당한 로마의 캄포데 피오레 광장에 동상을 건립했다. 이에 분개한 [[교황 레오 13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항의의 금식기도를 했다.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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