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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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1139년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를 지지했던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가 [[파문]]되면서 마침내 교회는 평화를 되찾았다. 인노첸시오 2세의 남은 재위기간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을 완전개 개축한 것 외에는 특별히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오랜 분열이 로마에 끼친 해악을 없애기 위한 그의 노력은 [[가톨릭 부르쥬 대교구|부르쥬 대주교]] 후보자 문제를 놓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지해왔던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분쟁을 벌이면서 거의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는 한편 인노첸시오 2세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티볼리]]와도 다툼을 빚어 도시 전역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렸는데, 그래서 로마의 파벌들은 티볼리가 인노첸시오 2세에 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켜 분쇄되기를 원했다.
 
또한 1139년 《모든 완벽한 선물》(Omne Datum Optimum)에서 인노첸시오 2세는 오직 교황만이 21세 이하의 종교적 군사적 조직인 [[성전 기사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성전 기사단의 권력과 부를 쌓는데 핵심이 되었으며, 역설적이게도 1307년 10월 그들이 진압당하는 사건을 초래하는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