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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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동시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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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 (1900년)|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ref name="안동의성1">[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ref>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또한 군정 세력은 취약한 정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없었던 점을 지적, [[1962년]] [[3·1절|3월 1일]]과 [[광복절|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 평가와 비판평가 ==
*[[4.19 혁명]]을 민주 문화의 배양기로 보고 5.16 군사정변을 민주 문화와 상반되는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은 사건으로 보는 비판이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78266 박정희 5.16 군사쿠데타 우리에게 무엇인가]</ref>
*재일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장면 총리의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ref>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92페이지</ref> 라며 [[국무총리|총리]] [[장면]]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다.<ref>{{뉴스 인용 |저자=김성수 기자 |제목=함석헌 선생이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다고?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74464 |뉴스=오마이뉴스 |날짜=2011-05-31 |확인날짜=2015-03-31}}</ref>
*혁명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지지부진했던 [[친일파]]와 기득권 청산 문제에 불만을 가졌고, [[장면]] 정부 역시 이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기에 불만이 팽배했다. 더욱이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민정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주장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박정희의 공약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민정이양과 친일세력 청산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장준하는 쿠데타 적대 세력의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혹평했다.<ref>{{뉴스 인용 |저자1=김덕련 기자 |저자2=최하얀 기자 |제목=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8247 |뉴스=프레시안 |날짜=2014-06-25 |확인날짜=2015-03-31}}</ref><ref>{{뉴스 인용 |저자=김덕련 기자 |제목=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6868 |뉴스=프레시안 |날짜=2012-08-16 |확인날짜=2015-03-31}}</ref>
*당시 사회 혼란 수습과 경제 발전이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한 장면 정부로 인해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당시 한국은 민주주의 보다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3.1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현충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인 프랭크 스코필드는 당시 군인들이 5.16혁명을 통해 무능과 부패에서 나라를 구한 것이라며 한국의 앞날을 가름한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평가를 했다.
 
== 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