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토 뤼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헬싱키 대학교 동문 추가함
44번째 줄:
 
== 초기 정치 경력 ==
[[File:Risto Ryti Home 1918.jpg|thumb|right|뤼티가 1918년-1935년에 살았던 집.]]
1918년 [[핀란드 내전]]이 터지자 뤼티는 어느 한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적군이 장악한 [[헬싱키]]에서 지하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내전 이후 뤼티는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1919년 [[국민진보당 (핀란드)|국민진보당]] 소속으로 [[핀란드 의회|의회의원]]에 선출되었는데, 당시 나이 30살로 의원들 중 두 번째로 어렸다. 같은 해, 국민진보당 동료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초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sfnp|Turtola|2000|page=405}} 뤼티는 1919년-1924년, 1927년-1929년 의회의원을 역임했다. 의원으로서 법무위원회, 재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24년-1927년에는 [[헬싱키 시 평의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핀란드 역사학자 마르티 투르톨라(Martti Turtola)에 따르면, 뤼티의 이른 정치적 성공은 뤼티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적 성향이 내전 직후 잘 먹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진보당이 군소정당으로 쪼그라드는 와중에도 뤼티 개인은 정치적으로 계속 성공했는데, 이는 뤼티가 경제 전문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 공직자 위치를 자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ref name="Turtola">Martti Turtola, "Risto Ryti: A Life for the Fatherland"</ref>
 
1921년, 32살의 뤼티는 [[유호 벤놀라]] 내각의 [[재무부 (핀란드)|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 1924년까지 재무장관직을 두 차례 연임했다. 1923년에는 스톨베리 대통령이 뤼티를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로 임명했다.<ref >{{cite web
|url=https://www.suomenpankki.fi/en/bank-of-finland/organization/board/board-members-in-the-history-of-the-bank-of-finland/
|title=Board Members in the history of the Bank of Finland |publisher=Bank of Finland
}}</ref> 뤼티는 1939년 총리에 취임하기 전까지 국립은행 총재직을 유지했다. 은행 총재로서의 역할은 1924년 1월 재무장관직을 사임한 뒤부터 실질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치생활 초기 시기 뤼티는 관청 회계를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 뤼티는 스톨베리파였지만 [[적핀란드]] 가담자들을 사면하는 것에 반대했다. 뤼티가 보기에 적군 가담자들은 범죄자들이었고, 그는 핀란드 내전의 사회적 원인을 직시하기를 거부했다.{{sfnp|Turtola|2000|page=405}}
 
1925년, 뤼티는 36세의 나이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2차 투표에서 뤼티는 가장 많은 지지표를 모았지만 3차 결선투표에서 [[핀란드 스웨덴 인민당|스웨덴 인민당]]이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지지하면서 캐스팅보트가 기울었다. 뤼티는 109대 172로 렐란데르에게 패배했다.{{sfnp|Turtola|2000|page=406}} 1930년대 뤼티는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대신 경제 정책에 영향을 발휘했다. 뤼티는 [[고전자유주의]] 경제학의 철저한 지지자였다. 뤼티는 [[핀란드 마르카]]를 [[금본위제|금태환화폐]]로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뤼티가 경제정책을 주도하던 당시 핀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디플레이션|물가하락책]]을 선택하지 않았고, 1926년 금마르카의 가치를 대폭 절상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핀란드는 영국이 그랬듯이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sfnp|Turtola|2000|page=406}}
 
1920년대에 뤼티는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미국의 은행업계 간에 국제 접점을 마련했다.{{sfnp|Turtola|2000|page=407}} [[월스트리트 저널]]은 뤼티의 정책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고, 1934년에는 영국-핀란드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사령관장을 수훈받았다. 뤼티는 [[영란은행]]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대공황 이전까지 금본위제를 고집한 정책적 공통점 등과 뤼티 개인의 탁월한 영어 실력이 그 바탕이 되었다. 뤼티는 영란은행 중역들과 정기적으로 통화하면서 경제 및 재무 정책을 논의했다. 뤼티는 [[국제연맹]]에서도 경제문제와 [[통화정책]]에 관한 여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sfnp|Turtola|2000|page=407}}
 
1930년대 뤼티는 막후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뤼티의 사회 정책은 양면적이었다. 뤼티는 [[실업자]] 구제 및 빈민 구호 정책을 반대했다. 그런 한편 강력한 경제로 얻은 이득은 일부 소수가 아닌 인구 전체에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뤼티는 1930년대 말 핀란드의 사회 [[복지]] 정책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체로 뤼티는 사업 및 산업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를 반대했으며,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을 거치면서 [[반소주의|반소주의자]]가 되었다.{{sfnp|Turtola|2000|page=407}} 그렇다고 뤼티가 독일식 [[나치즘]]이나 [[라푸아 운동]] 같은 핀란드 자생적 극우정치에 찬동한 것도 아니다. 뤼티는 영미식 자유경제의 찬양자였다.{{sfnp|Turtola|2000|page=408}}
 
== 총리 및 대통령 재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