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토 뤼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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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s://www.suomenpankki.fi/en/bank-of-finland/organization/board/board-members-in-the-history-of-the-bank-of-finland/
|title=Board Members in the history of the Bank of Finland |publisher=Bank of Finland
}}</ref> 뤼티는 1939년 총리에 취임하기 전까지 국립은행 총재직을 유지했다. 은행 총재로서의 역할은 1924년 1월 재무장관직을 사임한 뒤부터 실질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치생활 초기 시기 뤼티는 관청 회계를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 뤼티는 스톨베리파였지만 스톨베리 대통령이 [[적핀란드]] 가담자들을 사면하는 것에 반대했다. 뤼티가 보기에 적군 가담자들은 범죄자들이었고, 그는 핀란드 내전의 사회적 원인을 직시하기를 거부했다.{{sfnp|Turtola|2000|page=405}}
 
1925년, 뤼티는 36세의 나이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2차 투표에서 뤼티는 가장 많은 지지표를 모았지만 3차 결선투표에서 [[핀란드 스웨덴 인민당|스웨덴 인민당]]이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지지하면서 캐스팅보트가 기울었다. 뤼티는 109대 172로 렐란데르에게 패배했다.{{sfnp|Turtola|2000|page=406}} 1930년대 뤼티는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대신 경제 정책에 영향을 발휘했다. 뤼티는 [[고전자유주의]] 경제학의 철저한 지지자였다. 뤼티는 [[핀란드 마르카]]를 [[금본위제|금태환화폐]]로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뤼티가 경제정책을 주도하던 당시 핀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디플레이션|물가하락책]]을 선택하지 않았고, 1926년 금마르카의 가치를 대폭 절상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핀란드는 영국이 그랬듯이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sfnp|Turtola|2000|page=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