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에우제니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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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니오 3세는 재위기간 동안 거의 로마에 머무르지 못했다. 그가 주교로 성성(成聖)되기 위해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40km 떨어진 [[파르파 수도원]]에 갔을 때,로마에서는 교황의 세속 권력에 대적한 [[브레시아의 아르날도]]의 영향을 받은 시민들이 옛 로마 법률을 부활시켜 [[로마 코뮌]]을 세우고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를 [[파르티키]]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에우제니오 3세는 티볼리와 로마와 반목하던 다른 도시들,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의 지원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교황의 위세가 다시 기세등등해졌고, 1145년 12월 로마 코뮌은 에우제니오 3세가 로마에 들어오는 허락하고 성탄절을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티볼리를 적대시하는 로마 코뮌의 위험한 협약을 맺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1146년 3월 다시 로마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비테르보]]에 며칠 동안 머물렀다가 [[시에나]]로 갔고, 나중에는 [[프랑스]]로 갔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백국]]이 튀르크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12월 프랑스의 [[루이 7세]] 앞으로 칙서 《Quantum praedecessores》를 보내 그에게 십자군 원정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다. 1146년 [[슈파이어]]에서 열린 대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와 많은 귀족들도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베르나르도의 웅변술에 감복하였다.
 
==시복==